좋은 글

[스크랩] 어느 무명 겸업작가의 아내입니다

봄돌73 2007. 1. 29. 15:10
어느 무명 겸업작가의 아내입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남편이 작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공이 작가라는 직업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이순신에 대한 책을 쓰겠다며 관련 연구와 집필 활동을 시작하면서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대화가 줄었고, 함께 하는 여가시간이 줄었고,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이 크게 줄었습니다. 수입이 줄어든 이유는 남편이 집필을 병행할 수 있는 직장만을 골라 이직에 이직을 거듭했기 때문이었지요.

요즘 세상에 회사일에 전념하지 않는 직원을 대우해줄 회사가 어디 있을까요. 고정 소득이 줄었다면 부업을 통해서라도 부족분이 보충되어야했지만 1, 2년 정도면 끝날 거라던 작업은 3년 4년이 지나도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준비한다는 책에 대해서 저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그렇게 집착하나 싶어 남편이 출근한 사이 출력돼 있는 원고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읽으면서 얼마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릅니다. 재미없는 내용은 둘째 치고 이순신 장군 이야기에 웬 격물치지, 경영, 경사학, 춘추필법 등등의 용어가 쏟아져 나오는지... 정말 작가도 작가 나름이고 글도 글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게 이런 책이 팔릴 거라 기대했다가는 딱 굶어죽기 십상이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앞이 캄캄했습니다. 팔리는 건 고사하고 이런 책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누가 알까요. 그때의 제 심정을..

그날 퇴근해 돌아온 그에게 저는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매몰차게 원고를 본 소감을 말해줬습니다. 이걸 책으로 만든다는 건 자원낭비다, 읽히지 않는 책은 쓰레기다, 100권이라도 팔린다면 기적이다.. 한참을 듣고 있던 남편은 제 속도 모르고 막 웃으면서 그러더군요.

“나도 팔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100권은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최소한 500권은 팔리지 않겠냐...”


아기를 갖기 전까지는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기가 생기면서 저는 전업주부가 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생활고에 부닥쳤습니다.

그 문제로 자주 다퉜습니다. 다퉜다기보다는 제가 일방적으로 “그놈의 작업 빨리 끝내고 돈 좀 많이 벌어오라”고 바가지 엄청 긁은 거였지만, 그런 말들이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는 있었어도 그 일을 소명으로까지 생각하는 그의 의지마저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작업은 뜻이 맞는 몇 사람이 모여서 한다고 했습니다. 그분들 역시 겸업작가인 셈이었고 그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 중 한 분은 거의 반평생에 걸쳐 그 일을 해왔다고 하더군요.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또 1년, 2년..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갔습니다. 그 사이에 신기하게도 책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여러 곳 있었고 출판준비까지 했던 적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원고가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라는 것에서부터 이런저런 문제로 출판은 여의치 않아보였습니다.


월드컵이 있던 해 여름, 남편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고교선배가 운영한다는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선배가 많이 배려해준다면서 아주 만족해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은 제게 일언반구도 없이 경영이 어려워진 선배 회사를 위해 이런 저런 보증을 섰고, 그 결과는 아주 참담했습니다.

어렵사리 장만한 아파트와 세간마저 모두 경매처분되었고.. 차압딱지가 붙은 집에서 설마 하는 희망을 품고 숨죽여 3개월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봄이 끝날 무렵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남편은 시댁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편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과 선후배로 만나 결혼하기까지.. 그가 그 일을 하기 전까지... 생각해보면 남편은 정말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바로 그 책과 관련된 일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애초에 그가 글쓰는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의 고집을 꺾어놓지 못한 게 너무나 후회스러웠습니다.

재산을 몽땅 날릴 만큼, 서로의 신뢰를 송두리째 뭉개버릴 만큼 그 일이 그토록 대단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하루에도 수없이 되물었고 그럴수록 마음만 아팠습니다.

아이들은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 했습니다.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달에 한두번 시댁에 갔습니다. 갈 때마다 느꼈던 거지만 남편도 저처럼 이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안 좋았던 기억을 털어내려 했음인지, 아니면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했음인지 새로 다니는 회사에서는 거의 일에만 매달려 사는 거 같았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집에도 1주일에 두세번밖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어찌 보면 저 못지않게 좌절하고 상처받았을 남편.. 세상을 악으로 사는 것만 같아 불현듯 걱정이 됐습니다. 남편이 지내는 옥탑방 출입문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빈 소주병.. 웬만해서는, 특히 혼자서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던 사람.. 힘든 시간을 그것에 의지하며 지냈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습니다.


떨어져 산지 1년만에 우리 가족은 남편이 지내던 시댁에 가정을 꾸렸습니다. 제가 직장에 나가느라 돌봐주는 시간이 적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바뀐 환경에 잘 적응했고 더 밝고 씩씩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랑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습니다.

남편도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느끼는 게 많았나봅니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지난 과오를 만회하겠다고 작정을 했던 건지 제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겸업작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글쓰기를 중단했고 철야를 할지언정 절대 회사일을 집에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한 방에 모여 사니 참 좋았습니다.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대화시간도 많아졌고 무엇이든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들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마음을 추스르게 해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해 들어온 남편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는 다름 아닌 책 출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모 출판사에서 출판을 제의해왔다는 거였습니다. 다시 악몽이 재현되는구나 싶었습니다.

남편은 저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원고는 다 돼 있다,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 직장생활에는 아무 지장 없다...”

직장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말에 뜻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아이처럼 감격스러워하는 남편을 보면서 지금껏 말도 못하고 가슴 한편에 무거운 짐으로 담아두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구나 하는 실망감도 컸습니다.

남편은 이번 출판사는 상업성만 따지는 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작가들이 원한다면 글자 하나 토씨 하나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이제야 자신들을 알아주는 출판사를 만났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걸 보면 예전에는 그런 문제로 출판사들과 갈등을 빚었던 모양입니다.

몇 달 후 두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이제야 질긴 악연이 끝나는구나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그저 이 책 때문에 출판사가 큰 손해나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책 출간에 대한 저의 소회였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책은 완결이 아니었고 아직 두권이나 더 남았다고 하더군요.

남편은 시간이 충분하니까 틈틈이 하면 된다고, 회사 생활과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며 저를 안심시키려 애썼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도둑고양이가 밤일 나가듯 모두가 잠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컴퓨터 모니터를 조명삼아 자판을 두드렸습니다. 딱해보였지만 부질없고 무가치한 일에 매달려 사는 그를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함께 작업했던 대표작가라는 분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말을 꺼내며 사색이 된 남편.. 저에게 석달만 집필에 올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석달동안은 급여의 3분의 1 정도만 받게 될지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이미 회사에는 양해를 구한 거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회사 짤린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 다시는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참았던 것들을 퍼붓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대표작가 분이 사경을 헤매다가 며칠만에야 의식을 회복했고 만약 회복되신다 해도 성치 않은 몸으로 사시게 될 거 같다고.. 돌아가시기 전에 책을 완성해 드리는 게 이순신 연구에 반평생을 바친 분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겠냐고..


작년 봄, 책이 완간됐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고맙다고, 평생 죗값 치르는 자세로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참고 이해해준 이에 대한 예의라며 제 이름을 공동작가에 올려줬습니다.

책에는 7, 8명의 이름이 작가로 올려져 있었습니다. 모두 집필에 참여한 분들의 가족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책이 나오기 힘들었다고.. 공동작가로 올리는 것은 그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자 이순신 연구의 대중화를 염원하는 일종의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대표작가라는 분의 바람이었답니다.

기쁠 것도, 어떤 부와 명예를 바랄 것도 아니었지만.. 과연 제가 그런 자격이 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원고 교정을 부탁하며 건넨 원고 뭉치를 외면했고 심지어는 집어던지기까지 했던 저였기에..

책은 곧 10쇄를 찍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쪽 사정에 밝지 않아 10쇄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적어도 자원낭비에 쓰레기가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 감정이 복받치고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남편은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했고 광고도 한번 안한 책이 꾸준히 읽힐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터넷과 네티즌들의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몇 해 전, 바로 이 아고라에 어느 분이 올린<일본인이 이순신을 묻는다면>이라는 독후감의 영향이 컸다고 말입니다.

남편은 기대 이상의 반응에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정여론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난감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책 머리말에 있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책을 내기까지 25년이 걸렸다..’는 내용을 보고 작가들이 몸담고 있다는 연구회가 재정난에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도와주신다는 마음으로 책을 구매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연구회는 재정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더군다나 돈과 연구와는 더더욱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실이나 집기 같은 하드웨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만나 원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걸로도 충분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표작라라는 분이 혼자서 연구를 하시던 초창기 때는 정말 어려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사회생활을 갓 시작했던 그 분의 자녀분들이 필요한 비용을 다 댔고 이런저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책이 여기 아고라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기에 네티즌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남편이 한 일이 결코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기에.. 그리고 연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노라니 지난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사사건건 반대하고 훼방놓고 갖은 협박과 비난으로 남편의 집필작업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저였기에 책의 완성도가 부족하다며 죄스러워하는 남편의 자책은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고 꽂혔습니다.

책의 완성도에 실망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테지요. 그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글을 일종의 자성록으로 보아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출처 : 자유토론방
글쓴이 : 소라고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