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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처녀, "여자 혼자 여행하면 왜 안되나요?"

봄돌73 2009. 1. 30. 09:08

출처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482933


얼마 전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빅터 리 SHOW]` 방송을 준비하면서 방송 출연 섭외를 위해 모 작가분에게 연락했을 때였다. 이 방송은 책과 음악을 소개하는 대담 형식의 프로그램인데, 무려 3시간짜리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그것도 밤 8시부터 시작해서 11시에 끝나는데, 3시간 동안 작가는 책에 대해, 자신의 글에 대해 주구장창 이야기만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보통 글빨 좋은 사람보다, 말빨 좋은 초대손님을 희망하는 편이긴 하다. 그런데, 얼마 전 방송에 초대된 여행작가 L의 경우 이런 질문을 했다.

 

"늦은 시각이라서 어머니와 같이 가도 되죠? 요즘 사고도 났던지라."

 

이 야기를 듣는 순간 '아, 그렇지.'했다. 요즘 여자로 살기 어려운 한국 아닌지, 입에 담지 못할 사건 사고가 각종 매체와 인터넷을 장식하면서 부모님들의 걱정은 이래저래 커질 터였다. 특히 늦은 밤 외출과 처음 가보는 곳은 더할 게 뻔했다. 그 날 방송은 그래서 L 작가와 그의 부모임을 밖에서 기다리시게 하고 진행됐다.

 

그런데, 앞서 L 작가의 경우처럼 딸 가진 부모들의 걱정이 뒤숭숭할법 한 요즘,

우리 땅을 걸어서, 그것도 80일간 우리 땅을 혼자 걸어서 여행한 26세 여성을 알게 되어 그녀를 인터뷰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한다.

 

사진| 빅터 리, 여행 도중 먼지막이를 하고 셀카를 찍어본 '모 경' 작가

 

 

나이 1983년생. 출생지는 부산. 도보 여행을 혼자 떠나기로 계획한 것은 직장 잘 다니고 있던 2007년 봄.

 

"누나, 요즘 세상이 어떤 줄 알고, 미쳤어?"

 

'모 경'의 남동생은 그녀가 혼자 도보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자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도 딸의 도전을 듣고나서 한동안 말씀을 안 하셨는데, 결국 무모할지 모르는 딸의 도전을 받아들이셨다고.

 

홍대에서 그녀를 만나 가진 첫 느낌은 다른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얌전하고 조신(?)한 대한민국 보통 여성이란 점이었다.

마초맨다운 근육 울퉁불퉁한 여성 전사(戰士)를 내심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다부진 생각으로 굳세게 혼자 여행할 도전을 했다면 다른 여성들과 다른 뭔가 기대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빅터 리 앞에 앉은 모 경이 입을 열었다.

 

"여행과 바람. 두 단어에 공통점이 있어요. '머물지 못하는 것'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말 중에 '바람은 바람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하지만 그 누구도 '여행은 여행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여행은 무엇이다.' 라는 정의만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여행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길래 많은 사람들이 목 놓아 갈망하는 것일까 생각했어요"

 

여행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적기 시작했다. 조곤조곤하면서 정확한 말투가 듣는 이의 귀에 쏙쏙 와 닿는다.


"무수한 의문점이 생길 때 쯤 그 때 혼자 떠날 결심을 했어요. 이것은 자유였고 어떤 목적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죠.

또한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요."

 

"누구나 한 번 쯤은 이른 아침에 눈을 뜨게 되면 이거야 말로 아무 이유 없이 삶의 허무함과 슬픔에 사로잡히게 되잖아요?

 그럴 때 마음속에 여행의 향연을 일으켜 어느 순간 꿈꾸게 될 지도 모르죠.

 저는 약 80일 동안 배낭을 메고 지도를 발판삼아 [부산, 김해, 밀양, 경산, 영천, 포항, 영덕, 울진, 삼척, 동해, 강릉, 양양, 한계령을 거쳐

 홍천, 양평, 서울, 일산, 임진각, 부천, 수원, 제부도, 평택, 천안, 공주, 논산, 익산, 전주, 전읍, 장성, 광주, 나주, 무안, 목포, 제주도, 진도,

 완도, 에서 해남]까지 걸어서 갔어요."

 

 

사진| 빅터 리,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모 경' 작가

 

"땅 끝에서 나를 보았을 땐, 그땐. 조금이나마 여행의 정의를 내려 볼 수 있었어요. 여행은 자유 그 이상이었죠.

 누구에게 등 떠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그 무엇이 차 올라 숨을 토해내고 새로운 공기를 삽입해 나쁜 군더더기를 떨쳐 버리는 것.

 그러다 또 다시 숨이 막히고 더러운 때가 붙으면 떠나게 되는 것이에요.

 정신 못 차리게 힘들었지만 여행의 끝까지 인내로 참고 견디어 결국 목표하는 곳에 완주한 게 기억에 남네요."
 
그녀가 국토횡단을 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행을 가기 전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확실히 변했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 분명한 것은, 눈을 감고도 우리나라를 그릴 수 있고 전국 곳곳에 그녀만의 추억이 생긴 것이다.

어디에 가던 자신감도 생겼고 무슨 일을 하던 끝까지 하는 버릇도 생겼다.

 

나이 26.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는 나이에 그녀는 '길' 이 주는 '배움'을 알았고 '여행'의 '비움'을 느꼈다고 한다.

 

여행작가 '모 경'은 여행을 마치고 오는 우울증이 더욱 심각했다고 한다.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싫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들과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받아드려야 하는 부분에 극도록 예민해있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여행을 잊고 살아보기도 했단다.

최대한 예전의 평범한 나날들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냈다. 어느 정도 일상생활로 돌아갔을 때 쯤 그 때는 눈이 내렸다.

 

그 해 겨울, 울진에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 '모 경'은 다시 온 몸의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4시간 내내 잊고 있었던 여행을 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진| 빅터 리, '모 경' 작가가 여행 도중 찍은 사진 

 

'이곳은 내가 걸었던 곳인데, 는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고'

 

여행을 다시 떠올린 '모 경'의 눈가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버스에 같이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의 수근거림은 개의치 않았다.

 

'이쯤에서 그때도 울었지.'

 

추억에 젖어 눈을 감고 창밖을 보며 하염없이 울다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웃다가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고 했다.
여행도 그렇듯, 길도 그렇듯, 든 것은 제자리이니, 내 인생을 촉박해 하지 말자고 말이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모 경' 작가의 끝말이 아직도 내 귓가에 남는다. 

'촉박해 하지 말자'는 말.

 

8살에 학교에 가고, 20살에 대학 들어가고, 30살 전엔 회사 취직해야 하고,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하고 그렇게 살려다 보면,

100살 이전에 죽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올 법 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우리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라도 있던가?

 

조금 늦을 수 있다면 되돌아 가는 지혜도 가져보자. 너무 늦게 도착할 것 같다면 아예 다른 곳을 가거나 안 갈 수도 있다.

걷기에 팍팍한 인생이 아니라 걷는 그 과정이 즐거운 인생이기 때문이다.

 

경상도 26세 처녀 '모 경'이 전하는 우리 땅 도보답사기는 자기 인생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그렇게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