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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그 유혹적 운명

봄돌73 2007. 12. 3. 10:25

출처 : http://www.korean.go.kr/nkview/onletter/20071101/05.html

 

 

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쓰레기 분리수거는 참 귀찮은 일이다. 옛날에는 한 무더기 쌓아놓으면 청소차가 몽땅 실어가서 태우거나 묻었는데,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전체로서 ‘쓰레기’였다면 지금은 세밀하게 나뉘고 계층화된 별도의 쓰레기이다. 비닐, 종이, 플라스틱, 쇠붙이, 유리병, 스티로폼, 건전지, 형광등, 헌옷, 음식물 쓰레기, 별도로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 가구나 전자제품으로 분리되어야 하며,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 것들이 쓰레기봉투에 던져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 삶의 배설물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차곡차곡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리수거를 위한 분류 방식은 같지 않다. 아파트는 위와 같이 다소 촘촘하게 나누어야 한다면, 일반 주택은 다소 느슨하다. 공간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에는 쓰레기통이 딸랑 2가지밖에 없다. ‘캔·병·플라스틱류’와 ‘종이류 및 기타(!)’. 쓰레기통을 여러 개 만들기는 어렵고 수거할 인력도 없어 대충 ‘양분’하려다 보니 가장 마음 넉넉한 단어인 ‘기타’를 집어넣은 듯하다. 일본도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있는데, 쓰레기봉투가 가연 쓰레기용과 불연 쓰레기용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건전지, 형광등, 수은이 함유된 제품은 투명한 비닐봉투에 담아 버려야 한다. 신문·잡지, 우유팩, 캔, 대형폐기물은 별도의 돈을 지불해야 버릴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애완동물도 신고하고 돈을 내면 ‘버릴 수’ 있다. 일본에서 애완동물은 ‘쓰레기’이다.
   쓰레기를 어떻게 분류하느냐, 무엇을 쓰레기로 보느냐에 따라 이것을 모아두는 공간이 정렬되고 수거 차량의 종류가 달라지며, 거기에 기대어 밥 먹는 사람들이 바뀐다. 분류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행태도 달라진다.
   인간은 분류 본능을 갖고 태어나며 그것의 결정체는 언어이다. 분류는 인간이 세계를 분할하고 묶어세우는 일이다. 그 속에는 인간 사회의 의식과 무의식, 계급, 공통 지향, 편향성, 관습과 관행이 투영된다. 모 방송국의 ‘라인업’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두 팀이 몇 가지 겨루기를 하여 승패를 가린다. 그런 다음에 승자는 천국 체험, 패자는 지옥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상벌을 받는다. 이들은 지상에서의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나눌까?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부와 가난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었다. 예를 들어, 승자가 누리는 천국은 최고급 호텔에 가서 한 끼에 몇 백만 원 하는 일식을 우아하게 만끽하는 곳이다. 패자들은 ‘지옥의 나락’인 수산물시장으로 떨어져 ‘노동’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초라한 회 한 접시를 먹기 위해 쟁투한다. 국민 다수의 일상인 노동은 그렇게 ‘지옥’으로 분류된다.
   미국의 루비 페인 교수는 옷, 사랑, 시간 등과 관련된 실생활의 모습과 의미가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는 새로운 ‘계급결정론’을 이론화하였다. 그에 따르면 저녁 식사가 어땠는지 묻는 방식에 따라 ‘계급 간의 숨겨진 규칙’이 드러난다고 한다. 빈곤층은 ‘배불리 먹었니?(Did you have enough?)’라고 묻는다면, 중산층은 ‘맛있게 먹었니?(Did you like it?)’라고 한다. 이와 달리 부유층은 ‘차려진 음식이 보기 좋게 나왔니?(Was it presented well?)’다. 우리도 과거 못 먹던 시절에는 “많이 드세요”가 좋은 인사였다면 요즘에는 “맛있게 드세요”라고 해야 중산층에 든다고 해야 할 형편이다. 밥 먹는 행위를 어떻게 언어화하느냐에 따라 그가 속한 계급이 드러나며, 반대로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계급이 세계에 대해 어떤 분류와 대응 방식을 형성하고 전수했느냐에 따라 말을 한다.
   존재와 언어를 분류하려는 노력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들을 10가지 범주들로 분류한 바 있다. 16세기 최세진은 ‘훈몽자회’에서 2,240자의 한자를 ‘천문, 지리, 수목, 신체, 인류, 궁택’ 등 32부문으로 분류하였다. 19세기에 시소러스를 펴낸 로제는 25만여 개의 영어 어휘를 ‘추상관계, 공간, 물리학, 물체, 감각, 지성, 의지, 애정’ 등 8가지로 대분류하고 각 분야를 다시 1,042개로 하위분류했다. 어휘들의 의미 관계를 컴퓨터로 구현하는 것이 목표인 워드넷(WordNet)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모든 명사들을 ‘행위, 음식, 동물, 신체, 인간, 물질, 사건, 감정’ 등 25개의 분류 속에 집어넣었다. 이를 발전시킨 유로워드넷(EuroWordNet)은 각각의 언어와 무관하게 이 세상을 63개의 기본 개념으로 분류하고 있다.
   인간은 ‘분류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갖 분류를 하며 산다. 칸칸이 나뉜 서랍장에 속옷과 양말과 바지와 윗옷을 나누어 넣고, 컴퓨터 속에 자신의 자료들을 나름대로 분류하여 폴더 관리한다. 휴대전화 속 연락처도 친구, 직장, 가족, 동아리 등으로 분류한다(물론 모두 ‘하나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나누기도 하고, 직종과 직업, 나이와 지역, 그리고 ‘네 편 내 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도서관은 분류학의 총아이다. 대통령선거에 나온 후보들도 ‘너는 가짜 경제이고 나는 진짜 경제이다’, ‘너는 나쁜 대통령이고 나는 좋은 대통령이다’고 외친다.
   연속적인 세계를 불연속적인 기호로 표상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분류 본능이 개입된 것이다. 푸코는 아예 ‘사물에 적합한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표상의 전영역에 정련된 언어들의 그물망을 잘 배열했을 때’ 그것이 ‘학문’이 된다고 말한다. 학문은 명칭체계와 분류법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말과 사물>이라는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중국의 한 백과사전’의 이야기를 인용한 책 때문이라고 한다. 그 책에는 동물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a) 황제에 속하는 동물 (b)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c) 사육동물 (d) 젖을 빠는 돼지 (e) 인어 (f) 전설상의 동물 (g) 주인 없는 개 (h)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 광폭한 동물 (j) 셀 수 없는 동물 (k)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l) 기타 (m) 물 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n)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여기에도 ‘기타’는 꿋꿋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우스꽝스러운 분류를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동물’이라는 대상을 분류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의 동물 분류는 이와 달리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정당한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동일한 존재, 동일한 언어에 대해서도 분류는 달라진다. 분류는 주관적이다. 객관적 분류는 꿈이지 현실이 아니다. 다음 10개의 단어가 있다고 해 보자. 이 단어들을 두 집단으로 구분해 보라. ‘돌멩이, 핸드폰, 지우개, 소나무, 가방, 자동차, 소설책, 개구리, 텔레비전, 연필’. 어떤가?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들을 꾸역꾸역 두 부류로 나눈다.
   이들을 나눌 때 나누는 기준을 스스로 창안해 낸다. 분류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분류를 하게 된 기준이다. ‘부재하는’ 공통점을 찾고 묶어세우는 것이다. 거기에는 사회문화적이고 주관적인 세계 인식이 개입한다. 만약 당신이 위의 단어들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다면 그와 동시에 당신은 그 분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를 찾을 것이다. 공통된 특성을 찾고(실제로는 ‘만들고’) 이를 범주 외부와 비교함으로써 범주 ‘내부’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조르주 비뇨의 말대로 ‘사고의 역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물·존재·현상을 분류하려는 완만하고 인내심을 요하는 고집의 역사’이다.
   분류를 통해 사물의 질서에 질서가 부여되는 것 같지만, 그 질서는 언제나 실현 불가능하며 편벽되고 주관적이다. 분류의 결과 세상은 범주화된다. 범주화는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병’이라고 부르면 그 병의 크기, 색, 높이, 재질의 차이는 무시된다. 우리가 ‘개’라고 부르면 색깔, 다리 길이, 덩치, 생김새, 습성은 무시된다. 그래서 분류는 차이를 망각하게 할 위험을 늘 안고 있다.
   단명하는 개인 경험의 산물이든 켜켜이 쌓인 문화적 무의식의 산물이든, 우리는 분류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 분류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객관성, 즉 해당 시공간에 비교적 적절한 분류가 존재하는 것이지, 만고불변하고 전지전능한 분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류의 객관성에 대한 신봉은 분류를 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맥락을 소거시킨 탈맥락화·탈역사화의 결과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은 바로 분류의 위험성을 알리고 분류 자체에 대해 회의하고 성찰하자는 것이다. 세계를 향한 인간의 분류가 늘 주관성과 편향, 그리고 오류와 허점투성이임을 자각하고 인정할 때 우리가 나누는 언어는 좀 더 진지하고 상호 공존과 존중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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