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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님, 국어 좀 신경 써 주세요.

봄돌73 2007. 12. 3. 10:39

출처 : http://www.korean.go.kr/nkview/onletter/20071101/07.html

 

 

이대성(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선임연구원)
   드디어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다. 온 나라가 이른바 비비케이(BBK) 사건에 휘말려 있는 동안 각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하고 검증하는 일에 소홀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차차 검찰 수사도 마무리되고 후보들 간에 토론도 이뤄지고 나면 정책 중심의 선거가 되리라 기대해 본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각 후보들은 과연 국어에 얼마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들이 내놓은 교육 공약을 죽 살펴보았는데, 안타까움과 실망스러움 그 자체였다. 후보 대부분의 공약에서 국어 관련 공약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두루뭉수리로 표현해 놓은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 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비를 줄이는 일에는 저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겠다는 각오를 내비치고 있는 것과 비교하는 데에 이르면 할 말을 잃는다.
   왜 국어 공약은 없을까? 굳이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아도 될 만큼 지금 우리말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어 분야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이러나저러나 심각한 문제다.

   글쓴이는 얼마 전에 강의를 하면서 지난 10년 동안 새로 익힌 낱말 10개를 꼽아 보라고 한 적이 있다. 독자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시라. 고유명사를 빼고 나면 외래어 일색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엠비(DMB), 블로그(blog), 웰빙(well-being), 블루오션(blue-ocean), 이머징마켓(emerging-market), 적립식 펀드(積立式 fund), 방카슈랑스(bankasurance), 태스크포스(task force), 디티아이(DTI), 에프티에이(FTA), 빅리그(big league) 등등. 이젠 굳이 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뜻을 알 만큼 우리 생활 속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말들이다. 그런데 지난 1999년에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말들이 실려 있지 않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쓰지 않았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년에 출간 예정인 <표준국어대사전 개정판>에는 이 말들이 실릴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른 속도로 커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말이 안팎으로 부딪히고 있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거리 곳곳에는 영어로 된 간판과 상표 이름이 넘쳐나고, 우리나라 사람인지 외국인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름을 가진 이가 부르는 가요인지 팝송인지 모를 노래들이 판을 치고 있다. 힘 있는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서슴없이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하고 있고, 나라 곳곳에 영어 마을, 영어 학교 따위를 세우면서 영어 조기교육 열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정에 편승하여 대선 후보들마다 영어 사교육비를 줄인다는 미명 아래, 공교육 안에서 영어 조기 교육을 강화하고, 영어 밖의 과목도 영어로 수업할 수 있도록 교사를 기르며,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특별 구역을 만들겠다며 거창한 영어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공약의 틈바구니 속에서 ‘만 8세가 되면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겠다’는 한 후보의 공약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선 후보들의 영어 공약은 국민들의 영어 사교육비를 줄여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대로 공약이 지켜지면 그동안 모국어가 해 오던 일을 차차 영어가 대체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공약에는 모국어가 홀대받고 있는 상황을 되돌려놓으려는 의지는 없고, 오히려 영어의 영향력을 더 넓히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른바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방법이라 여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돈 안 되는 한국어는 대충 뜻만 통하면 될 정도로만 공부해도 되지만, 돈 되는 영어는 철저하게 공부해야 나중에 먹고살기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온 국민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정작 회사에 입사하고 나면 국어 실력이 형편없어서 문서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하는 신입사원이 늘고 있어 문제라고 해도 이런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사실 국어 실력이 부족한 것은 신입사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전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로 시작했다. ‘자랑스런’은 ‘자랑스러운’을 잘못 적은 것인데도 수십 년 동안 온 국민에게 그렇게 외우도록 그대로 두었다가, 전문을 고치면서 이제야 바꾼 것이다. 만약 정부에서 내는 문서에서 틀린 영어 단어가 드러났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그대로 두었을까?
   지금은 ‘공직선거법’으로 이름을 고쳤지만, 이 법의 예전 이름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이었다. 이를 풀어쓰면 ‘공직선거 방지법 및 선거부정 방지법’이 되는바, 선거를 못하게 하는 법이 되어 버린다. 뒤늦게나마 고치긴 했지만 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의 국어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보, 그동안 집안일을 많이 못 챙겨서 미안해요. 이제부턴 집안 청소도, 설거지도, 빨래도, 아이 공부도 내가 열심히 시킬게요.”

   이 문장은 글쓴이가 강의에서 과제로 낸 편지 글에서 따온 것이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대부분 그냥 지나칠 법한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무슨 문제가 있을까? 이 문장을 그대로 풀어 보면, ‘집안 청소도 시키고, 설거지도 시키고, 빨래도 시키고, 아이 공부도 시키겠다’는 얘기가 된다. 즉, 앞으로도 쭉 집안일은 다른 사람 시키고 자기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강의를 하면서 이런 잘못을 수도 없이 보게 된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치는 교사는커녕, 제대로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교사도 부족한 상황에서 학교 문을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영어 밖의 과목까지 영어로 수업할 수 있는 교사를 기르는 일이 급한 게 아니라, 우리말부터 잘할 줄 아는 교사를 기르는 일이 더 급한 것이다.

   글쓴이는 종종 수강생들에게 ‘부서지다’와 ‘부숴지다’ 가운데 무엇이 맞는지, ‘맞히다’와 ‘맞추다’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어보곤 한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지금껏 수백 번은 썼음직한 말인데도 그 정확한 표기도, 정확한 뜻도 모른 채 살아온 것이다. 몰라도 별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을 뜻하는 ‘tomorrow’를 일부러 ‘tommorow’로 쓰면 금세 뭐가 틀렸는지 지적한다. 언제는 ‘should’를 쓰고, 언제는 ‘would’를 쓰는지도 척척 대답한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수백 번은 썼을 테고, 이런 걸 모르면 사는 데 문제가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국어는 그렇게 영어보다 덜 중요한 언어로 수십 년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지난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에서 남북의 정상은 ‘역사·언어·교육·과학기술·문화예술·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 교류 협력 발전’에 힘을 쏟기로 합의하였다.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는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분야이다. 진정한 통일은 남북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웃사촌이 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합의문에서 ‘언어 교류’를 언급한 것은 의의가 크다. 통일이야말로 남북을 하나로 묶는 가장 중요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언어 교류는 통일 이후에 의사소통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혼란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 한국어가 세계 속에서 국력에 걸맞은 지위를 얻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통일 시대를 대비해서 우리말 교육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내고 투자를 해야 하며, 전문 인력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 후보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하여 안타까울 뿐이다.

   이 글은 영어 공약의 실효성을 따지려 한 것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잘 지켜져서 국민의 사교육비 부담도 줄어들고,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다만, 영어만 잘하면 출세할 수 있는 반쪽 사회를 만들어 영어만 잘하는 반푼이만 키우는 교육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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