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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무현대통령을 욕하는 사람과도 함께 사는 법, 스님께 물었다.

봄돌73 2009. 6. 3. 18:17

매일같이 노무현 대통령을 욕하는 아줌마, "지 애비가 죽어도 그렇게 울겠어?"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지 열흘이 지났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서거 첫날 같습니다. 동네 아줌마들이 혹시나 노무현 대통령 욕을 하지나 않을까 날이 서있습니다. 매일같이 노무현대통령을 욕하는 아줌마가 아니나다를까 오셔서 국민장에서 울던 사람들을 비꼬면서  “지 애비가 죽어도 그렇게 울겠어?” 라고 하기에 “저 지금 너무 마음이 아파서 괴로우니까 건들지 마세요”라고 했더니 입을 다뭅니다. 그 사람들의 관점(이라고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헛소리)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설령 그 사람들이 제 가게에 오지 않아서 제 수입이 줄어 든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동네 아줌마가 조선일보 식으로 말하는 것도  못 듣겠는데 같이 봉사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식으로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 나누기를 듣는 순간 제 마음은 ‘이제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도저히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과는 함께 일을 할 수도 쳐다볼 수도 없고, 말을 더군다나 섞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확 일어났습니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마라?

왜냐면 내가 돈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 공부하러 와서 수행과 봉사를 하는데 내가 괴로워하면서까지 일을 할 필요가 있냐고 제 자신에게 되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보왕삼매론의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잡혔냐구요? 스님 법문 듣고 다시 이야기 하죠.  

                                  <법륜스님- 스님은 웃는 여유가 있어 좋겠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상대가 “예” 해주기를 바라지만 상대도 자기 생각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남이 내 뜻에 순종해 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말하면 남편도 “그래, 그래.” 하기를 원하고, 아내도 “예, 예.” 하기를 원하고, 부모까지도 “오냐, 오냐.” 하기를 원해요. 누구나 이렇게 원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상대방이 “예, 예” 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예, 예”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일까요? “예, 예.” 하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대 역시 자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와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는 가볍게 해야 합니다. 가볍게 한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가 들어줄 것이라는 전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내 말을 안 들어줄 바에야 굳이 왜 말을 해? 내 입만 아프지.’ 하는데 그것은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조건 순종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이런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왕이에요. 왕은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항상 “‘예, 예.” 하고 순종하니 자신이 말하고 생각한 것은 다 진리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의견을 거스르면 화를 내고 처벌을 하거나 때로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우리가 악덕 군주라고 하는 사람도 한 개인으로 보면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말하는 입만 있었지 듣는 귀는 없이 키워졌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면 모든 사람이 따른다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결국 이런 교만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혼율이 높은 이유는 아이를 최고로만 키우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갈수록 이혼율이 높아질 거예요. 또 두 번, 세 번 이혼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이혼이라는 것이 서양 문물이 들어와 우리 전통 문화가 파괴되어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에요. 가장 큰 원인은 자녀를 하나나 둘밖에 낳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집이라도 아이가 하나 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무엇이든지 최고로 해 주려고 합니다. 월급의 절반을 들여서라도 아이한테만은 최고의 것을 해 주고 모든 기준이 아이가 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좋게 말하면 개성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주 버릇없고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에게 제대로 안 해 준다고 느끼면 “제대로 해 주지 않을 바에야 뭐 때문에 낳았어요?”하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고 덤비게 됩니다. 이런 아이의 태도는 부모가 한 행동의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보통 때는 버스나 기차를 타다가도 아이와 함께 갈 때는 택시를 타거나 고속열차를 타잖아요. 내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아이를 위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택시나 좋은 기차를 타고 가는 것에 습관이 듭니다. 그래서 아이가 좀 크거나 아니면 집안 형편이 나빠져서 좀 낮춰서 살자고 하면 아이는 싫어합니다. 아이가 나빠서라기보다 자랄 때 그렇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떠받들어만 키우기 때문에 이기적인 아이들로 자랄 수밖에 없다.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때 손님으로 초대받아서 아프간 사람의 집에 가면 다섯 살, 일곱 살 된 조그만 아이들도 손님 접대한다고 물도 가져오고 옆에 줄을 서서 인사하며 일을 합니다. 손님이 나가면 신발까지 닦아서 앞에 놓아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때요? 오히려 아빠나 엄마가 아이 앞에 신을 갖다 주고 신겨 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집에서는 부모가 자기를 떠받드는데 학교에 들어가면 아무도 부모처럼 자기에게 안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친구들이 이기적이라고 느끼는 거예요. 아마 앞으로는 옛날처럼 의리 있고, 오래가는 친구 관계를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기만 하고 자라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세대차이가 예전보다 심하게 생기는 겁니다. 마치 기독교와 무슬림이, 또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문화가 달라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반면에 같은 세대면 이제는 한국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은 오히려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언어가 다른 것 빼고는 금방 동질감을 느껴요. 그런데 같은 나라에 살아도 기성세대하고 신세대는 말과 얼굴 모양만 같고 나머지는 굉장히 다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앞으로 남한과 북한 사람들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 같은 말을 쓰고, 얼굴 생김새가 같고, 옛날의 풍습이 같았다는 것을 빼놓고는 서로 만나면 공통점이 별로 없어요. 이것은 단순히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왕삼매론 중 특히 이 가르침이 아주 중요합니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상대가 들어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고 내 의견을 그냥 내려 놓아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말할 때는 상대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지 말고 내 의견을 그냥 내놓아야 합니다. 또 상대가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그 의견에 꼭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견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견해를 더 얘기하고 싶으면 얘기는 더 할 수 있되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의 견해를 내놓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고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누구나 의견을 솔직하게 내놓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다시 토론해서 같은 것은 함께 가고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해서 달리 가는 거예요.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뽐내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을 압니다. 의견을 내더라도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주고받을 뿐입니다. 무심하게 주고받는다는 말은 자기 의견이 있으면 억누르지 않고 가볍게 내놓고, 다른 사람의 얘기도 무심히 듣는 걸 말합니다. 저 사람의 의견을 다 들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듣는 것입니다. 내놓을 때 가볍게 내놓고, 들을 때도 가볍게 듣고 거기에 대해서 상대가 들어야 한다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고 상대가 말하면 내가 다 들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갖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 내 마음의 답답함도 없고 상대의 얘기도 귀담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판단은 나중에 하는 것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 공부가 굉장히 되었다는 뜻.

  마음이 교만해지면 나에게 불행이 됩니다. 주위에 숲을 이루듯이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거기에 걸림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거기에 공부가 굉장히 많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 뜻에 맞는 사람들만 주위에 데리고 살면 패거리가 되고,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 내 말에 섣불리 “예” 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서도 내가 만약에 능히 거기서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공부가 아주 잘 된 사람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내 뜻에 맞는 사람과는 같이 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살다가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이 한두 명 생긴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며 배척하느라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수행의 과제로 삼으라.’는 건 내가 내 생각에 빠지는 것을 거슬리는 그 상대가 막아주어 나도 모르게 공부가 되어, 사람들이 나를 따라주니까 내가 교만해지는 것을 막아준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수행의 과제로 삼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스님 법문 들으니까 좀 낫네요. 아주 조금이요. 그런 사람들로 제 수행의 과제를 삼는다면 제게 이익이 되겠다 싶습니다. 오히려 제 마음 공부를 위해서 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해주니 달리 보면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구업을 지어가며 말이지요.

어제 친구 놈 둘이 전화연락도 없이 저녁 먹자고 왔습니다. 정토회에 모임이 있어 안된다고 했더니 한번 빠지랍니다. 빠지는 건 안되지만 정말 가고 싶지는 않다고,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과 일하는게 싫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묻습니다. 자기는 젊었을 때는 생각이 달라도 함께 토론 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상대를 안하는데 저더러 ‘네 성격에’를 붙여가며 용하다고 합니다. 

저는 오히려 젊었을 때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말을 할 때는 작정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덤비지요. 오히려 지금이 다른 관점의 사람들과 섞이는 편입니다. 그 말을 듣던 또 한 친구가...

“야, 예전에 영숙이 아니야. 사람 됐다니까”

친구들의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들으며 피식 웃었습니다. 친구들 말대로 여전히 거칠지만 많이 부드러워졌다니 믿습니다. 칭찬에 억수로 인색한 놈들이니까요. 제가 그전처럼 제 생각과 맞지 않으면 외면하던 것을 조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게 된 것은 다 스승님을 잘 만난 덕분입니다. 

6월 13일. 교사들을 위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6월 13일. 법륜스님께서 교육을 위해 일하시는 선생님들을 위해 즉문즉설을 해주신다 합니다. 아이가 제대로 잘 크려면 첫째 부모가 제대로 살아야 하고, 둘째 그 아이를 지도하는 선생님께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주시는 영향력은 부모 못지 않으니까요. 학부모님들이 얼마나 매 학기초마다 좋은 선생님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지 선생님들은 모르실 겁니다. 

어떤 선생님이 정말 학부모들에게 좋은 선생님인지, 어떻게 아이를 가르치면 좋을지 그날 오셔서 스님께 질문하시면 아마 속이 확 뚫리는 명쾌한 답변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부끄러우시면 미리 질문을 주셔도 됩니다. 선생님만 와야 하느냐구요? 아니죠. 학부모님도, 예비 선생님을 꿈꾸시는 분도, 학생도 다 괜찮습니다^^

일시: 6월 13일. 토요일 오후 2시 - 4시

장소 : 조계사 불교 역사문화 기념관

질문을 미리 하실 분은    자세히 보기  에 들어가셔서 하셔 질문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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