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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완섭 칼럼] 존대법을 없애자

봄돌73 2006. 3. 8. 15:18

존대법을 없애자

1993년 어느 봄날 오후 2시 서울대 학생식당. 영삼이와 대중이, 종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중이는 91학번이고 영삼이는 92학번, 종필이는 93학번이다. 그러나 종필이는 대중이의 고교 2년 선배다. 먼저 영삼이가 말한다.

“대중이 형, 안녕하세요? 어, 종필이도 있구나? 짜식 오늘따라 유난히 귀여운데? 역시 신입생들은 귀엽단 말야. 나도 너같은 때가 있었나 싶다.”

대중이가 말한다.

“응. 영삼이 왔니? 근데 새꺄. 종필이가 뭐냐, 종필이가. 그리고 뭐, 귀여워? 이 새끼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이 형은 내 2년 선배야. 짜식이 사람을 몰라보고 말을 함부로 하고 있어. 종필이형, 미안해요. 제가 후배 교육을 잘못시켰네요.”

종필이가 말한다.

“으응. 아냐 괜찮아. 영삼이형은 그래도 내 꽈 직속 선밴데 깍듯이 선배 대접을 해드려야지. 영삼이 형, 이리 앉으세요. 대중이 저새끼 말은 신경쓰지 마시고요. 짜식이 누구 대학 생활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영삼이는 곤란하다.

“어.. 이거 어떻게 된거야.. 난처하네. 종필이가 대중이형의 2년 선배라?”

아마도 대학생활을 해본 사람은 이런 경우를 자주 겪어보았을 것이다. 군대식 상하관계가 단단하게 뿌리박고 있는 우리 대학 사회에서는 학번과 나이, 그리고 고교 졸업년도라는 세가지 각각 다른 계급장이 통용된다. 물론 학번이 가장 힘센 계급장이지만 나이와 고교졸업년도, 혹은 학년이라는 계급장도 무시할 수 없다. 위의 대화는 학번과 고교 졸업년도라는 두가지 계급장이 한 장소에서 서로 부딪치게 된, 재수없지만 자주 발생하는 사례다.

나는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단점이라 할지라도 가능하면 좋게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한국어의 존대법이다.

일반적으로 우랄알타이어 계통인 한국어와 일본어, 터키어 등에는 존경어가 발달해 있다고 한다. 그러니 굳이 우리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이 존대법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고민해 왔는데, 지금와서 내린 결론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저항이 많더라도 없애버리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라는 것이다. 만일 앞으로 한국이 잘 된다면 한글 때문이고 혹 망한다면 이 존대법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가장 애를 먹는 부분도 바로 이 존대법이라고 한다.

한국어의 존대법은 그야말로 ‘빌어먹을 정도로’ 잘 발달해 있다. 그냥 한두 가지면 참겠는데, 이건 극존칭에서부터 예의바른 존칭, 좀 낮은 존대법, 평대법, 하대법, 욕설 수준의 최하대법 등등 실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만 해도 가짓수가 많다.

예를 들어 누구에겐가 밥 먹기를 권유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경우 상대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진지드세요. 식사하십시오. 식사하세요. 식사해요. 식사 드세요. 식사 하시게. 밥 먹으세요. 밥먹어라. 밥 처먹어라 등등. 밥이라는 명사와 먹는다는 동사에 모두 존대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가지가 된다. 영어로는 모두 "Let's eat." 이외에는 다른 번역이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다. 물론 "Please eat something, Sir."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다른 의미를 지닌 문장이라 할 수 있다. 한가지 의미 전달에 이처럼 여러 가지 방법이 필요하는 이유는 똑같은 문장이라도 말하는 사람과 상대방의 지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높이거나 낮추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을 존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할 것은 한국어의 존대말은 결코 ‘서로’ 존대하기 위해 생겨난 어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말의 존대법은 상대에게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고, 사람 사이에 위아래를 정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존대법은 모든 사람을 상하 관계로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즉 순간순간 어떤 어법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내가 상대보다 얼마나 더 높은가, 저 사람은 나보다 얼마나 더 낮은가를 서로 합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대법은 엄밀히 말해 ‘하대법’ 이기도 하다. 서로 존대하는 경우란 두 사람의 지위가 같은 경우에 한할 뿐이다.

존대법은 또한 사람을 공격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전에 한보 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박경식이라는 의사에게 집권당의 한 국회의원이 반말을 사용했다가 서로 고함지르고 삿대질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일이 있다. 이 때 증인이 ‘반말하지 마세요’ 라고 하자 집권당의 정치몰이배가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데 반말좀 하면 어때’ 하고 받아쳤다. 이것은 말투로 상대방을 위압하고 들어가려는 공격적인 어법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런 경우 상대방의 공격을 가만 놔두면 ‘나는 당신보다 못한 종입니다’ 하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어법을 달리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계급 사회가 남겨놓은 전통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농공상 장유유서 남녀유별 등 직업과 나이와 성별에 따라 여러 가지 계급 구분이 엄격했었다. 사람들은 유교의 예법에 따라 수십 수백가지의 어법을 구사해야만 했다. 그나마 지금 정도로 된 것도 조선 시대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결과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민주 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선시대의 말하는 법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어 가운데 뿌리깊게 자리잡아 우리말을 해치는 존대법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남에게 자랑할만한 사회를 결코 이룩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존대법, 하대법이 남아있음으로 해서 세대간, 남녀간, 계층간, 선후배간 위화감이 나날이 깊어질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백해무익한 갈등이 양산되고 있다. 카스트 제도가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존대법도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대단히 견고한 장애물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여러 가지 존대법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말을 건네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적절한 화법과 그에 따른 상하관계를 설정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듣는 사람이 각각의 어투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는 데 있다. 말하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즉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나를 어떤 지위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말투로부터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나이가 좀 들어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예외없이 평소 동생뻘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하대를 당하는 ‘수모’를 참아내야 한다. 그것 뿐인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선배라는 이유로 존대를 하고 동생 취급을 당하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위계 질서는 한번 정착되고 나면 비록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평생동안 지속된다. 나는 대학 시절 이런 문제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례를 자주 보아왔다. 그래서 간혹 고교 후배들을 만나게 되면 좀 학교가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재수하지 말고 ‘현역’으로 들어가라고 권하곤 했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군인들은 계급이 높거나 군대에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로 모든 일상생활에서 ‘상전’을 모셔야 하고 상전들은 여러 ‘종’을 거느릴 수 있다. 군대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야만적인 사회로 취급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존대법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위계질서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조직에 이 존대법이 그런 부작용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자동차 운전을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운전자와 부딪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운전자들이 길거리에서 싸우는 것을 관찰해보면 참 재미있다. 이들의 싸움은 대체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논쟁이 아니라 누가 나이가 많은가 하는 문제를 갖고 벌어진다. 앞에서 청문회 예를 들었듯이 자기가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상대방에게 존대말을 하도록 만들 수 있으면 논쟁에서 절대 우위에 설 수 있음은 물론 억지 주장도 통하기 때문이다. 씨름으로 치면 샅바싸움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존대말을 사이에 두고 시작한 싸움은 존대말에 관한 다툼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처음 한두 마디는 논쟁으로 시작한다.

“야 임마 운전 똑바로 해.”
“아쭈? 네가 먼저 끼어들었잖아. 어따 대고 억지야.”

이런 식의 대화는 그 거친 말투만 제쳐놓으면 어디까지나 서로 상대방에게 사고의 책임이 있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곧이어,

“이 자식이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반말이?”
“임마, 그럼 어린놈한테 존대말 하랴?”
“그러는 넌 몇살이나 처먹었어?”
“이 자식이 넌 집에 애비에미도 없냐? 막내 동생뻘도 안돼보이는 게.”
“어라? 야임마 내가 너보다 더먹었으면 먹었지 덜먹진 않았다. 주민등록증 까봐. 몇살인가 보자.”

이런 단계를 거쳐 감정이 악화되고 싸움이 커진다. 처음엔 어떤 공통의 문제거리를 둘러싼 의견 충돌이던 것이 한두 마디 지나면서 존대법 때문에 갈등이 확대되어 자신의 인격이 걸린 감정 싸움, 인간대 인간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버리고 만다. 아마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외국 사람이 길거리에서 이런 싸움을 보게 되면 정말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논쟁이란 시비를 가려 정의와 합리가 관철되는 방식 대신 나이 많이 먹은 놈이 항상 이기는 원리를 따른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세대간에 갈등의 골이 나날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어에만 존재함직한 ‘말대꾸’ 라는 개념을 한번 살펴 보자. 이것은 너무나도 우스운 개념이라서 외국어로 번역할 수가 없는 용어 가운데 하나다. 마치 ‘이지메’가 외국어로 번역이 불가능하듯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나이어린 사람이 뭐라 반론을 제기하면 ‘어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어른한테 꼬박꼬박 말대꾸한다'고 윽박질러 눌러버린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하대를 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학생을 종으로 여기는 의식 구조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학생과 선생 사이에 동등한 인간 관계가 싹틀 리가 없다.

부모들도 집에서 ‘어른에게는 말대답하지 말고 항상 네 하고 대답해야 착한 어린이다' 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논리나 이성이나 정의보다는 ’나이‘가 항상 모든 가치판단의 기초가 된다는 고장관념을 갖게 된다.
이처럼 존대법은 모든 사람을 잘게 쪼개서 상하관계로 나누어 놓고,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대적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문화 속에서 자라난 어린이들은 학년이나 나이로 상하관계를 짓고, 일단 존대말을 듣는 ‘높은’ 사람이 되기만 하면 자기보다 ‘낮은’ 모든 사람을 이길 수 있다는 의식에 젖어드는 것이다. 사실 초중고교에서 이 존대법으로 인해 생겨나는 선후배 사이의 야만적인 위계질서는 이루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다. ‘선배는 하늘이다’ ‘선배한테는 이유없이 맞아도 된다.’ ‘선배에게 대드는 놈은 죽어도 싸다’는 식의 미개한 사상들이 아무런 의문없이 받아들여지고 통용되는 곳이 바로 한국의 학교인 것이다.

직장에서는 항상 이 '서열' 때문에 말썽이 생기고 팀웍이 깨어진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윗자리에 있으면 '존대'를 하고 ‘하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이든 사람의 조직 생활을 못견디게 만든다. 그리고 후배를 먼저 승진시키는 것은 많은 경우 회사를 그만두라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우리 나라 법조계에는 후배가 자신보다 윗자리로 승진하면 그 아래 기수는 모두 명예 퇴직하는 관례가 아직도 불문률처럼 시행되고 있다. 법관 사회가 얼마나 미개한가를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청소년들을 대하면 자주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는 얘기를 듣게 된다. 인생의 황금기를 살고 있는 그들이 늙은이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못할 망정 하루 빨리 늙은이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정상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가정과 학교에서, 혹은 사회에서 ‘나이든 것들’에게 천대받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종 취급을 당해야 하는 청소년 입장에서는 언어 생활에서부터 근본적으로 행복 추구권이 박탈당한 상태이다.

존대말이라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당사자에게 단순히 간단한 어미 변형 이상으로 커다란 심리적인 영향을 끼친다. 평소 존대하던 사람에게 말을 낮추거나 평소 낮추던 사람에게 말을 높이게 되면, 자기 자신이나 상대방에 대한 마음 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하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반말을 들으면 대단히 기분이 나쁘고 적대감이 생겨난다. 어떤 경우에는 반말을 해줬으면 하는 상대가 존대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또한 이런 존대법을 가지고서는 남녀평등도 기대할 수가 없다. 다수의 결혼이 연상 남자와 연하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존대말을 사용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하대를 하도록 강요당한다. 방송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녀관계를 관찰해 보면 대부분 남자는 여자에게 반말을, 여자는 남자에게 존대말을 하도록 대본이 작성되어 있다. 방송 작가들이 남녀의 상하 계급관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합리주의와 평등의 원칙 아래에서만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체제이다. 인도나 아랍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못하고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종교를 앞세워 철저한 계급 사회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합리주의와 평등의 정신이 관철되는 사회라면 나이나 성별같은 원초적인 이유로 구성원의 상하를 규정짓는 관습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군대든 회사든 학교든 직책과 능력에 따라 필요한 역할이 부여되고, 일단 조직을 떠나면 평등한 관계로 지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존대법이나 호칭은 영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번 아랫사람이면 영원히 아랫사람이 된다. 그래서 직장 상사는 업무가 끝나도 언제까지나 ‘상전’일 뿐이다.

군복무 시절 내가 근무하던 기지의 군인 아파트 촌엘 가 보면, 대령 마누라가 하사관의 부인들을 수시로 집에 데려다 가정부로, 유모로 일을 시키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남편이 종이기 때문에 부인도 종이 되고, 그 자녀들까지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어느 대학생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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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이 존대말에 관한 문제를 많이 고민했고, 그것 때문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나보다 한살 위에 있는 사람에게 나는 존댓말 사용하는 것이 무척 싫어서, 언제나 틈만 있으면 소위 ‘맞먹는’ 관계를 노리곤 했다. 웬만하면 학교 선배라고 해도, 1년 정도 위이면 말을 놓거나 아니면 상대방에게 존댓말을 쓰도록 암암리에 강요했으며, 실제로 성공한 적이 많았다. 아마 나의 이런 노력이 성공한 것은 나의 선배인 그 양반도 존댓말로 인해서 고민했을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나는 정말 얼토당토 않게, 후배에게는 꼭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강요했으며, 그에게 하대를 했다. 나는 스스로 모순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나는 선배와 맞먹기를 바라면서, 어찌하여 후배에게는 그것을 극히 금지하여 왔던가. 이런 자가 당착과 이기적인 행동이 어디에 있는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후배에게 스스로 말을 높이기로 결심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후배는 매우 만족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어색한 관계가 계속된다. 원래 선후배 사이에는 상하관계를 정해서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색한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할텐데, 어째서 그러지 못하는가? 그 어떤 것도 예전의 친밀함을 방해한 적이 없는데, 그것을 잃어 버렸다. 바로 이 말 때문인 것이다. 선후배 사이에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별다른 이유없이 그 좋은 관계를 잃었다면, 아마 나와 같은 비슷한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문제는 모두가 한번씩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1995.8 하이텔 플라자에서>

이 글을 쓴 필자는 존대법에 대해서 상당히 특이한 실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보통 ‘형’이라고 부르는 1년 선배들에게 소위 말하는 ‘말트기’를 강요해 반말하는 관계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후배들이 자신에게 반말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 스스로 반성하고 후배들에게 존대말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관계가 더 서먹해졌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가 존대법의 대표적인 폐단으로 지적될 수 있는데,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으면서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어법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인간 관계 자체가 파괴되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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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대법이 우리나라만큼 잘 발달된 곳이 없다는 얘기는 자랑 비슷하게 많이들 들어오셨을 겁니다. 물론 반말이 기본인 영어권도 제3자에게는 격식을 차리는 말을 쓰지만 우리의 존대어와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남을 높인다고 you를 안 쓰는 게 아니니까요. 대통령도 you고 할아버지도 you고 꼬마도 you이므로 동등한 ‘너와 나’의 관계로 묶입니다. 그래서 그쪽에는 논리가 아니면 안 통하기에 과학이 발전했는지도 모릅니다. 유교적인 요소로 억누르려고 하면 유치한 인간 취급을 받습니다.

조선은 아시다시피 완벽한 신분사회였습니다. 양반과 노비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습니다. 존댓말은 신분을 차별하는 의식이 언어에까지 확대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비의지적인 요소" 내지 자연적 요소인 나이로 인간을 제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합리적입니다. 나이를 먹기 위해 특별히 노력해야 할 일은 없는데도 나이가 많다는 것이 커다란 기득권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놓은 것이죠. 희한하게도 요즘 애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한두살 많은 애들이지 결코 어른이나 노인이 아닙니다. 이는 나이에 의한 위계 사상이 경로의식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존대법은 지배자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었던 미개한 계급 사회의 잔재입니다. 유교의 도덕률이라는 것은 신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배자의 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알게 모르게 유교적인 사고 방식이 많이 박혀 있습니다. 모두 합리적으로 반성해보면 근거 없는 얘기들이지만 600여년에 걸쳐 그런 관습에 물들다 보니 지금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런 전근대적인 위계 질서가 뿌리깊게 남아 있는 것은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 상하 복종을 생명으로 삼는 군대 조직이 득세를 하게 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현대에 와서는 바로 이 ‘군대문화’가 우리 사회에 수직적 계급 문화를 창궐하게 한 주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 군번과 계급 따지는 건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고, 내가 대학교 들어가니까 나보다 한 학번 높다고, 별 인간같지도 않은 것들이 선배 노릇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더군요. 재학생들이 신입생 기합 주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 대학 문화를 보고 그래도 지성의 전당이라는 곳이 이 정도면 이건 참 심각한 폐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생년월일이야 어찌됐건 먼저 들어온 놈한테는 존대말을 쓰는 것이, 이건 뭐 공자 말씀이 왜곡된 것도 아니고, 군발이 문화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재수, 삼수한 사람들도 신입생이니 학번 높은 놈들이 기합주면 주민등록증 꺼내서 대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당합니다. 이건 유교적으로 봐도 장유유서에 대한 하극상인데 말입니다. 또, 그렇게 당한 녀석들이 나중에 후배가 들어오면 되풀이하는 것이 우리 대학의 수준입니다. 이런 걸 보면 세월속에 면면히 이어지는 업이란 참 무서운 겁니다.

결국, 현대에 들어와서 유교식 복종체제를 강요할 명분이 사라지자 대신 군대 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애들 소꿉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입사 1년차’니 ‘입사 2년차’니 하면서 군대 문화를 어떻게든 사회에까지 연결시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할 뿐입니다.

우리의 기업에는 군대식 문화가 엄청나게 팽배해 있습니다. 계약에 의해 일해주고 돈을 받는 떳떳한 관계인데도 ‘부하’ 직원들을 무슨 노비처럼 부립니다. 자기도 당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일종의 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나이 내세우고 입사 몇년차를 내세울까 하는 생각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비의지적 요소를 중시하는 사회는 결코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발전할 수 없을 겁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손톱 긴놈이 장땡이라더군요.

나이 내세운다고 결코 경로사상이 고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패륜범죄에서도 보듯이 오히려 그에 대한 반동만 더 강해집니다. 나보다 높은 사람에겐 존대말을 낮은 사람에겐 반말을 하는 구도는 가장 좋게 보아서 어른을 공경한다고 미화할 수 있지만 근본에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존대어라는 것은 사람 사이에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커뮤니케이션을 제한하는 형식의 틀입니다. 형식을 너무 강조하면 내용이 죽게 되는데 우리의 언어 생활이 꼭 그 경우가 아닌가 싶군요. <1995.8.3 하이텔 플라자, 장재웅(TheUser)>


호칭 인플레이션

“언니, 잠깐만 비켜주실래요?”
“응? 명숙씨구만. 그런데 언니가 뭐야, 언니가.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4년째 수영을 배워오고 있는 주부 유명숙(34)씨는 수영장에 가면 아는 사람들이 꽤 많고 친하다. 그런데 제일 당황스러운 것이 바로 나이많은 이들에게 ‘형님’이라고 호칭해야 할 때. 동서도 시누이도 아닌 사람을 ‘형님’ 이라고 부르려니 영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곳에선 그것이 아예 규칙처럼 되어 있어 다른 호칭을 쓰려 하면 오히려 이상해진다.

주부 양인경(36)씨의 경우 자신이 제일듣기 싫어하는 호칭이 ‘아무개 엄마’. 그래서 아이들을 통해서 알게 된 엄마들에게도 꼭 이름을 물어 ‘은정씨’ ‘춘희씨’ 하고 부른다. 5살 이상 연상일 때는 ‘이모’라고 부른다고. 어느 젊은 학원강사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주부 학생들에게 ‘어머니’라고 호칭했다가 ‘나이는 많아도 미혼’이라는 여성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계질서나 신분 등에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적당한 호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중앙일보에 난 기사 가운데 일부이다. 사회 생활을 할 기회가 거의 없는 주부들 사이에서 이 호칭 문제는 특히 힘든 모양이다. ‘형님’이니 ‘이모’니 ‘어머니’ 같은 별 말같지도 않은 호칭들을 만들어내서 서로 강요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이름이란 그 사람을 부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이름 부르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이런 코미디가 연출되는 것이다.
이 호칭의 문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경우, 이성간, 그리고 결혼으로 생겨난 인간 관계에서 특히 심각하다. 남한테 존경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심리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보다는 형식으로 그런 것을 받고자하기 때문에 어린 사람들에게 절을 시키고 존대말을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늙은 것들에게 이런 강요를 당하며 자라난 젊은이들도 점차 머리가 커가면서 똑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존칭에 대한 허영이 많은 사람들은, 남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보다는 최대한 그럴듯한 직책에다가 님짜를 붙여서 불러주기를 바란다. 부장님, 교수님, 과장님, 변호사님, 간호사님 등등. 가짓수도 참 많다. 직책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님짜 붙일 건덕지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나온게 선배님, 사장님, 여사님, 선생님, 기자님 같은 호칭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딴 짓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친것들이라는 생각 이외엔 별로 할말이 없을 정도다.

정치권에서는 또 어떤가. 총재님 장관님 위원장님 국장님 실장님 특보님 비서관님 등등의 존칭이 사용된다. 다 이름 부르는 게 결례로 여겨지는 사회 풍토 때문에 생겨난 호칭들이다. 즉 호칭 인플레이션 사회에서 님짜가 빠지면 곧 욕인 것이다.

존대법의 폐단은 직장에서 평사원들 사이에도 심각하다. 직책이 있는 사람한테는 그저 부장님, 과장님, 이사님 하고 불러주면 그만인데, 평사원끼리는 직책이 없으니 ‘씨’ 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것 때문에 문제가 많이 생긴다.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늦게 들어온 직원이 감히 자기 ‘이름’을 부른다고 화내고 앙심을 품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전에 내 가까운 친구 하나가 그런 얘길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자기 부인한테 회사의 어떤 여자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마구 욕을 해대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어린 게 자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고교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그 친구보다 회사 생활은 먼저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또 물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주길 바라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뭐라 대답이 없었다. 갓 입사한 평사원이라 무슨 주임이니 대리니 하는 어거지 직책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무 대안도 없으면서 무조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 여사원의 입장에서는 그 친구가 기분 나빠한다는 것을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 회사에 먼저 들어온 것도 아니기에 ‘선배님’도 안되고, 그렇다고 같은 평사원끼리 ‘선생님’ 하고 부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 일로 그 친구에게 참 많이 실망하고 말았다.

아마도 위의 경우 내 친구 녀석이 그 여사원보다 입사가 빨랐다면, 아마도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강요했을 것 같다. 이 존칭은 대학 사회와 직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조직에서 지위가 같은 동료이지만 잘 보이려면 ‘님’짜를 붙여줘야 하는데 마땅한 직위도 없고, 그래서 '선배님' 이라고 억지춘향식 존칭을 붙여주는 것이다.

전에 내가 다니던 잡지사에 고약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 이 여자는 직장 경험도 얼마 되지 않은데, 다른 직원들이 자기 이름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데 얼마 뒤 신입 사원이 하나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다 싶었던지 그 여자는 신입 사원에게 자신을 ‘선배님’이라고 부르도록 ‘교육’ 시켰다. 그 뒤로 무슨 전화라도 한번 왔다 하면 신입 사원이 ‘이은실 선배님 전화 받으세요’ 하고 불러대고, 짧은 말 한마디 할 때에도 그 6자나 되는 길다란 호칭을 다 붙여대는 진풍경이 자주 벌어졌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참으로 힘든 고문처럼 느껴졌는지 그 신입 사원은 기회만 있으면 윗 사람들에게 다른 팀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지만 회사에는 그다지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몇차례 회사에 사표를 내곤 했는데, 몇달 뒤 그 대단한 ‘선배님’이 회사를 그만둬 버리자 그 뒤로는 오랫동안 회사를 다녔다.

잡지사라서 취재 기자들이 있었는데, 이 기자들을 서로 부르는 호칭을 두고도 문제가 많았다. 보통 잡지사에서는 입사가 빠른 사람을 ‘김선배’ ‘박선배’ 하고 부른다. 하지만 그 회사에는 늦게 들어왔지만 기자 생활은 먼저 한 경우, 누가 ‘선배’인지 판가름하는 게 좀 곤란해지게 된다. 게다가 후배 기자들은 ‘김후배’ ‘박후배’ 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른다. 또한, 같은 팀에 ‘김선배’가 두명 있는 경우도 있어서, 이런 때는 ‘김영삼 선배’ 하고 이름을 다 불러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호칭을 둘러싼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팀장이 바뀔 때마다 ‘정책’도 달라져서 혼란이 생기곤 했다. 어떤 사람은 회사 고참이 선배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기자 생활을 먼저한 사람이 선배라고 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어떤 팀장은 아예 선배니 하는 호칭을 모두 폐지해버리고 ‘아무개 기자님’으로 통일하자고 해서 그렇게도 써봤는데 역시 너무 긴데다 억지춘향 식이어서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성원들이 서로 악의가 없는데도 이처럼 쓸데없는 문제로 티격태격하게 만드는 것이 이 한국의 고질병인 존칭이다. 그리고 제 아무리 솔로몬이라고 해도 모두가 만족한 해법을 찾아낼 수가 없다. 이럴 때는 ‘피터’ ‘찰리’ 하고 이름만 부르면 만사 오케이인 영어가 참으로 부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호칭 인플레가 제일 가관인 것이 아마도 병원이 아닌가 싶다. 요즘 병원에서는 의사든 간호원이든 간에 '선생님' 소리 못들으면 살기 힘든 분위기인 모양이다. 이것은 물론 더 이상 의사들에게 당하고 살 수 없다고 결심한 간호원들이 우리도 간호‘원’이 아닌 간호‘사’ 가 되기로 결심하고, 1980년대 초부터 기나긴 투쟁을 벌인 결과 얻어낸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한 십년 전 법률도 모두 바뀌고 해서 이제 우리 나라에는 ‘간호원’이 없어지고 ‘간호사 선생님’ 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간호사들이 정말로 원한 것은 자기 직업의 이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선생님’이란 존칭을 듣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병원에서 닥터든 너스든 모두 ‘선생님’이 되셨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경기도 안성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다 돌아온 친구 한명으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간호사들에게 '김 선생님' '이 선생님' 이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요즘엔 사정이 달라져서 간호원들 가운데에서도 고참한테는 '여사님' 이라고 불러야 된다는 것이다. 그 녀석 얘기론 여사님이라고 안 불러주면 병원 생활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즉 이여사님, 박여사님 이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간호원들이 의사를 상대로 존대말 전쟁을 벌이는 심정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존칭 인플레도 이 정도면 극에 달한 느낌이다. 이 다음엔 또 어떤 새로운 존칭이 생겨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존대법 인플레이션은 사이버 공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980년대 말 국내에서 처음 컴퓨터 통신을 하던 엠팔이라는 집단에서는 회원 간에 '님'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컴퓨터 통신 인구가 수백만을 헤아리게 된 지금에 와서 이런 관행은 PC통신 사회의 불문률로 자리잡았다. 사태를 이렇게 만든 시발은 당시 엠팔 회원이던 류경희라는 노인이었다고 한다. 나이차가 많이 나서 어색하니 누구한테나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전엔 이름 뒤에 직접 '님'을 붙이는 것은, 가끔씩 존경하는, 그것도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시인을 높여 부르는 정도였다. '소월님', ‘영랑님’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제 통신망에선 님짜 안붙이면 욕으로 생각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통신에서만 그러면 좋겠는데, 그렇게 길들여진 통신인들은 실제로 만나도 서로 무슨 무슨 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제 '님'이라는 극존칭이 평칭으로 되어 버렸으니 앞으로 더욱더 존경받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슨 새로운 존칭을 요구할지 지켜보아야 겠다. 존칭 인플레이션 시대에 손해보는 건 한국말인 듯하다. 말이 자꾸 길어지니까.

존대법은 사람들을 계층으로 나누고, 알 수 없는 위화감을 조성하고, 결국 한국어를 장황하고 비능률적인 언어로 만들어 간다. 하지만 이러한 폐단은 어찌 보면 사소하다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존대법의 가장 큰 악폐는 사람들 사이에 매번 어떤 상하관계를 설정하도록 강요하고, 그것 때문에 구성원들 사이에 회복할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생겨난다는 데 있다.

이로 인해서 우리 사회에는 남자와 여자,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들 사이에 깊은 원한과 불신의 계곡이 생기고 말았다. 젊은 세대는 나이든 세대를 싫어하고 피하려드는데, 이는 ‘어른’과 한자리에 있으면 말하는 것이 불편하고 행동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술집에서 나이 많은 사람을 &#51922;아내는 광경은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 정도면 세대 간의 전쟁이라 아니할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또한 연상의 남자와 연하 여자로 구성된 가정에서 여자는 존대, 남자는 하대하는 관습이 일반화됨으로써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고, 따라서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대단히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보다 더 존경받고자 하는 존대 인플레이션은 경제에서의 인플레이션과 똑같이 닮아 있다. 남들보다 값을 비싸게 받아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서로 경쟁하듯 값을 올리다보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생겨 모든 사람이 망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존대법과 존칭의 상황이 이와 똑같은 것이다. 서로 겉으로 존경받으려 애쓰지 말고, 반말과 이름부르기를 생활화함으로써 인플레이션 심리를 잡아가두는 실천이 필요한 때다. 우리 사회를 사람들이 서로 친근하게 지내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이 바보같은 풍습을 없애는 일이 급선무라고 하겠다.
출처 : 사회방
글쓴이 : 펜사콜라 원글보기
메모 : 내 주장과는 약간 다른(난 존대법을 없애자는 건 아니다) 주장이지만 지금 우리말의 존대법이 너무 가치하락하는 중(인플레이션)이라는 점에서는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