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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과거와 빨들의 박근혜 죽이기

봄돌73 2006. 6. 30. 13:39

 

국내좌익세력들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끈임없는 왜곡중에 대표적으로 친일과 군사독재자 그리고 유신통치,지역감정유발이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친일왜곡에 대한 진상 그리고  군사쿠데타와 유신 독재주장 및  굴욕회담 한일협정,베트남파병에 대한 비판, 지역감정유래,용공조작설,노동자 농민 탄압,영구통치설 등등에 대한 반박과 박대통령의 업적을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조명한  글들입니다.

 

--박정희 친일왜곡의 진상 및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

 

먼저 노사모 위시해서 국내 좌익세력들이 인터넷에 퍼뜨리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대통령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좌익과 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뿐만 아니라 언론도 친일이고 공무원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느냐?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재물 영달을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합니다. 나폴레옹전기를 통해서 군대 군인을 동경하게 된 박정희는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김종신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 즉 나폴레옹에 대한 소년시절의 동경에서 비롯되어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다.) 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 대통령(소위)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의 최일선에서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③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 및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국내좌익세력들이 현재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치 조선의 무장 독립투쟁 단체처럼 교묘히 속이는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드립니다.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같은 단체는 없었습니다. 조선인 공산유격대조차 없었지요 이런 시대상황이 그들로썬 참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합니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를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완전 친북학계입니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입니다.


여러분 팔로군이 뭘까요?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이의 팔로 빨갱이 공산군이였습니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중국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더욱이 아시다시피 팔로군은 중국통일후에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입니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바치는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 독립군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독립투사들조차 공격해서 상당수를 죽여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조선의 해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전 세계 공산화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박정희는 한때 빨갱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설사 활동을 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람을 배신자, 기회주의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대로 남로당에 남아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 했었어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어디 소속들이길래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불분명하며 어쨌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완전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군대지휘관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으면 임무를 잘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광복후 일본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의 내연녀였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적 언동했다?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공적 사적 외교석상에 노대통령처럼 막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통이 취임후 미국가서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굴욕적 한일협정체결~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통이 이렇게 받았겠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습니까?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습니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겁니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일협정 성사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나라한테 일본에서 자꾸만 시비를 거는 독도를 포기하라고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대노할 정도로 미국의 조속한 한일수교협정체결 압력이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통은 독도를 끝까지 배타적 경제수역 (EEZ)로 지켰습니다 단지 국제분쟁화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책에 직접적이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정책기조를 선택했습니다 독도영유권에 정작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은 김대중정권 그것을 계속 연장해준 노정권입니다


60년대 그당시 냉전시대의 강대국의 논리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할려고 했을까요? 미국의 압력이 컸다는 것은 이미 뉴스에 보도되어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되는 문제의 수준이 아니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하겠지요

 

박정권이 개인청구권을 팔아 먹었다는 것은 잘못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개인청구권 대신 국가가 대신 받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장면정부부터 입니다 개인청구권이란 개인이 일본정부와 재판을 해서 배상받는 것인데 실제로 배상받은 사례는 거의 잘 없죠 일본이 주장했던 것은, 서류로 증빙할 수 있을 경우에만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전쟁 문제도 있고, 모든 부분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개인 보상도 포함해서 국가가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이라든가 하는, 국가와 개인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코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로부터 피해를 본 조선국민 개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피해보상 하겠다는 것을 국가가 가로챈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할 경제개발 종자돈을 베팅할 시기를 놓쳐야한다니....?
그당시 아사자 동사자 전염병자 비일비재하는 국가에서 할수 있는 최선책였을까요?
회담이 성사된 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돈을받아 투명하게 충실히 모범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금보면 긍정적 평가가 국민적인 대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금액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라니..? 논리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박정권의 비리를 캐기 위해 만든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으로 조사에 참여한 이원덕 국민대 교수의 글 인용합니다
-세간에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 관련 한국 정부 외교문서가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한.일회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 자격으로 3만5000여 장에 이르는 외교문서의 공개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 협상' '매국외교'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오히려 필자는 악조건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난적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박정희 정부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로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결실은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를 부관참시하러 들어간 사람이 이런 평을 한 것은 박통의 승리라고 할수밖에 없슴)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는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땅 독도는 현재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해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에게도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이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할려고 혈안이죠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노무현대통령은 DJ정권의 해수부장관출신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신한일어업협정 연장하신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친일파로 치자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자금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통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통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에서 박통은 신친일파로 분류 돼있습니다.
내용)이단체는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하였습니다.(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통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요?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본다면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의 지역감정 유래--

60년대 호남사람들이 선거때 박정희대통령한테 50프로 이상 표를 준 사실을 아십니까?

 

(김정렴  비서실장의 말 )

과거부터 유력정치인중 하나가(김대중) 호남을  차별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지역감정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되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발 정책면에서 얘기를 해 보죠.

 우리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해서 100년 이상 뒤떨어져 있고, 미국, 영국에 대해서는 20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데다 자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공업화하느냐, 이것이 초미의  과제였습니다.

 그럴려면 가장 입지가 좋은 데다 공장을 세워야 되거든요.  우리 한반도를 보면 제일 좋은 곳이 동해안이고 남해안입니다.  단애가 져 가지고 바다가 급히 깊어져요.  그리고 남해에는 섬이 많고, 섬이 있으니 방파제의 필요가 훨씬 덜하고 준설도 많이 할 필요 없이 항구가 되죠.  더욱이 거긴 일제 때부터 도로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해안의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은 수심이 앝으니까  여기 10만 톤, 25만 톤 급 항구를 만들려면 이만저만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도 장항까지 가는 것과 호남선 이외에는 안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해안 따라서 도로가 없고 제한된 돈으로 일은 빨리 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남해안하고 동해안에 개발의 중점을 둔 겁니다.


당시 국토 개발 계획이 있었죠.  건설부 산하의 국토연구원이 있어서 주원 건설부장관이 국토 계획의 전문가였는데 지금 말씀대로 강원도는 관광자원, 수산자원 정도지 여기다 공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하는 식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경제권을 몇 개로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하고 난류가 대한 해협에서 교체가 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부산 울산 포항 쪽입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거기다 지어서 오폐수를 쉽게 내보내고 특히 공해 많은 온산 공단에 들어간 유해 공장의 폐기물도 해류가 거기서 되돌아오니 거기에 넣어도 되었던 거죠.  하지만 서해 바다는 기껏해야 간만의 차이뿐이고  옆으로 크게 흐르지 않아요.  경기도,  전북, 전남 해안에 섣불리 공장을 지었다가는 해수가 들락날락만 하지 옆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조개고 뭐고 다 오염이 됩니다.  그 때 돈만 있었으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이 있었으면 더 급한 데 썻겠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우선 순위의 결정과 요충식 경제 개발의 불가피성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이다’ 하며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었는데  왜 안 하려고 그러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유세 때 전주 광주 가셔서 ‘공업화 안 돼서 당신들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다른 데서 공해로 시달릴 때  당신네들은 더 깨끗한 공장 지어 가지고 나중에 더 잘산다’ 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경제 개발 정책상 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무척 애쓰신 것이 종합 제철을 광양에 갖다 지으신 것과 여천 석유화학 단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

김정렴 정치회고록 발췌

 

-5.16은 쿠데타가 아닌 진정한 혁명이다-

 

박정희는 원래 만주군관 학교 출신이고요. 거기서 수석 졸업을 해서 일본 육사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도 박정희를 두고, 일본인을 이긴 조선인이라 하여 조선의 자랑으로 여겼죠. 무슨 친일파니 매국노니.. 그따위 평가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손기정 선수 아시죠? 일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에 금메달을 안겨주잖아요. 그래도 조선인들은 조선인이 왜놈들 보다 잘나서 조선인의 기상을 보여줬다고 떠받을었죠. 박정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박정희는 일본군으로 잘못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 하급장교로서  근무했으며 그의 비중은 크지 않았습니다.(만주국은 일본국과는 좀 다른 나라였죠. 뭐~ 괴뢰국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오족협화의 기치를 내세운 그런 나라였습니다.)
 
먼저  독립군 토벌 광복군 토벌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근거 없는 날조이고요. 천황 혈서 충성맹세 같은 것도 아무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특히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도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측에서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고, 김대중의 창씨개명이 도요다 다이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러한 정치공작도 쏙 하고 들어가버렸지요. 당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 80% 이상이 한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부친도 했었던 것이고요. 별로 친일이니 매국의 증표가 될 수는 없지요.

 

  그리고 5.16은 정변이 아니라, 명백한 혁명이고요. 당시 윤보선, 장면 정부는 무능과 부패의 절정을 달렸는데.. 박정희가 빈농의 아들인 것에 반해 윤보선은 친일명문벌열가문 출신이었고요. 장면도 역시 김구 선생의 지시로 반민특위가 작성한 친일파 살생부 268인 중에 한명으로 등재된 악질 친일파였죠. (박정희 해당없슴)

 4.19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진 이후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데... 비참한 민생은 내팽계치고 10번도 더 개각이 이뤄지죠. 이유는 바로 장관 자리 하나씩 해 먹으면 가문의 영광이요,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처럼 코드정치다, 보은인사다.. 하면서 전부 다 해 처먹었죠... 박정희가 5.16 혁명을 일으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합니다. 5.16으로 인하여 장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진짜 친일파 정권이 무너지게 된거죠. 그런데 왜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냐고요?

당시 4.19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회가 5.16 지지성명을 발표하죠. 그리고 장준하 선생께서 5.16은 4.19 정신을 이었다며 칭찬하게 되죠. 이처럼 학생, 대중, 지식인 너나 할 것 없이 5.16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4.19 정신의 계승이라 칭송했습니다. 군사정변??? 5.16때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대규모 교전도 없었죠. 그래서 5.16을 무혈혁명이라고 합니다. 즉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불순한 무리들은 5.16을 폄하하며..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후 혁명공약을 내걸어 모두 완수하고, 민정이양을 거쳐 직접 선거로 대통령직에 당선됩니다. 당시 서민이었던 박정희와, 친일벌열가문의 후예인 윤보선이 경합을 벌이는데.. 간발의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되게 되죠. 즉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박정희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통치설은 터무니 없는 억지이며 반박정희 세력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박대통령의 유가족인 박근혜씨의 증언을 올립니다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임종조차 못했던 자식으로서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께서 여한없이 눈을 감으셨으리라는 점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믿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여한이 없으리란 뜻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그 무렵 국가를 위한 자신의 설계를 거의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셨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끝은 우리 겨레의 5천년 한을 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떻게든 경제자립과 자주국방을 이루어 가난과 외침에 시달려온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의 조직적인 방해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추진 중이었으며, 우리가 핵을 개발함으로써 전쟁 억지력이 생겨 북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78년 9월26일 우리 힘으로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여 세계 일곱번째의 보유국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고, 그날 쓰신 일기를 보면 “자주국방과 조국근대화작업이 완성단계로 접어들었다. 흥분과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최규하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은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여러 번 “최총리가 하면 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분의 경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81년까지는 핵개발과 정부이양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오늘 우리나라는 혼란없이 선진국 대열에 섰을 것입니다."

 

 

--  후진국에서 경제건설과 민주화가 양립가능했겠는가? --

(산업화에 민주화를 동시 추진, 성공한 예는 없다)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서구국가들에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실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도 이들 국가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하거나 「선민주화, 후산업화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에 대해 선발 산업화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많은 후속국가들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 내지는 순차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편견이거나 도그마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참정권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영국도 산업화를 어느 정도 성숙시킨 연후에야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후속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의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지향형국가」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발전지향형 국가는 단순한 권위주의체제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국가가 사회 내의 제계급(지배 및 피지배계급 모두)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면서도(그 국가가) 발전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정책적 및 제도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뿐이다. 이런 특징을 갖춘 국가를 「발전지향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관찰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전의 예는 모두 그 국가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지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선산업화 정책은 정당했다

이렇게 볼 때 산업화의 초기 단계인 1960∼70년대, 특히 그 초두인 1960년대 전반의 한국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치는 병행추진이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박정희 체제의 가치 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고노동,저임금같은 노동권의 취약성과 환경권관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초기 산업개발 당시부터 개발 우선 정책집행 과정상 당면한 고노동 저임금 및 반환경적 요소를 용이하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쉽게 간과했고 넘어갔다면?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60년대 내수시장이 열약한 상태에서 수출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상태에서 기술도 없고 자본도 별로 없는 초기 개발 단계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분야는 상식적으로 많지 않고 선진국보다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제한적 선택일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겯제개발이 바로 노동자 억압으로 주장하는 지금 좌파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저노동 고임금과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천연자원과 산업자본의 취약성을 극복해 짧은 세월안에 산업화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선모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발산업국가도 후발국가도 산업화과정에서는 모두 고노동,저임금이었고 친환경적이지 못했다.  적절한 노동과 임금은 산업화가 어느정도 진척된 이후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국가의 노동복지정책 즉 국가환경정책으로 위상이 올라간 것이 그간의 세계사이며 환경권도 마찬가지이다.
더우기 경제개발시대 공무원 및 기업가들의 유착과 연결된 반노동권적 정책 집행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식 부재와 결여에서 파생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까지 모두 박정희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인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몹시도 배고팠던 시절, 남북대치상황에서 안보불안도 컸던 시절.
경제건설을 통한 산업화 근대화가 이룩되고 나면 그 토양위에서 우람하고 튼튼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은 옳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과연 노동자 농민의 희생뿐인가?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이름 : 자유주의연대 날짜 : 2005-04-28 10:34:36 조회 :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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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한수 기자]‘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과 농촌·중소기업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소득 격차를 사회문제로 낳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처럼 쓰고 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29일 열리는 ‘교과서 포럼(상임대표 박효종)’의 ‘중·고등학교 경제 관련 교과서 이대로 좋은가’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교과서 서술이 객관적인 통계 수치를 무시한 오류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큰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한수기자 hslee@

 

 

-국내좌익들이 펌하한 새마을운동 세계가 배운다.-

 

중국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배우라고 3년간 3만명의 공무원을 한국에 보낼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론 공무원 35만명을 한국에서 硏修연수받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엔 후진타오 주석 등 최고지도부가 31개 省성·市시 간부 200명과 일주일 合宿합숙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역사와 성공요인을 학습했다. 중국은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했지만 농민 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都도·農농격차로 고심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 새마을운동이 낙후한 농민·농업·농촌의 ‘3農농문제’를 극복해낼 정책 모델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의 농촌부흥운동을 배우기 위해 몽골,베트남,라오스,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가 우리 새마을운동을 배워가고 있다. 새마을 관련조직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연수받고 돌아간 각국 공무원과 농민이 160여개국 4만명에 이른다. 북한 김정일조차 새마을사업이 한국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바깥 시각은 이런데도 정작 나라 안에선 새마을운동이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농촌의 겉모양을 바꾸는 데 置重치중했다’고 쓴 근·현대사 교과서를 토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그 교과서가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대중의 열정을 끌어내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한’ 성공적 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중국의 開放개방과 발전 지향의 사회주의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한국 守舊수구 左派좌파의 눈엔 거꾸로 보인다는 말이다.

정부는 새마을운동 첫해인 1970년 3만5000개 마을에 335부대씩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마을길 넓히고 다리 세우고 창고를 지으라고 장려했다. 이듬해엔 성과가 좋았던 1만6000곳을 골라 시멘트와 철근을 추가로 나눠줬고 성과 없는 마을엔 지원을 끊었다. 경쟁을 통해 농민들의 마을 살리기 의욕을 북돋운 것이다. 국토균형발전이니 뭐니 해가며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라고 해서 곳곳에 국민 稅金세금만 뿌려대는 이 정권과는 달랐다.

중국이 우리에게서 배운 새마을정신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고 그걸 디딤돌 삼아 압도적 경제력으로 한국시장에 밀고 들어올 때 ‘새마을운동 깎아내리기’에 골몰했던 사람들은 모두 꽁무니를 내리고 시치미를 뗄 게 분명하다.


 

--누가 과연 민주화에 진정한 공헌자인가(무궁화) ---데일리안토론방

 

흔히 말하기를,

박정희는 독재자이고,

김영삼 김대중은 민주화 투사라고 부른다.

이거 완전히 새빨간 거짓 선동이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아세우면서,

자기들이 민주투사인양 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자들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살았었고,

내 눈으로 똑바로 박 대통령을 보았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살았었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 동네 이장일을 보았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시골 농번기가 되면

어김없이 시골 농촌에 내려 와서는

농부들과 함께 일하면서 막걸리를 즐기셨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어른들은 우리집에 모였었다.

그리고는 동네 어른들은

면장, 군수를 찿아다니면서

이번 농번기에 꼭 우리 마을에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자고 하였다.

당시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의

농촌부흥 운동으로 가난을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다.

만일, 박 대통령이 정말 독재자였다면,

과연 당시 농촌 농부들이 이토록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겠는가?

 

나는 1970년대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모대학에 다녔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중화학, 중공업이 집중 육성되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들은 세계 최하위 빈곤국가에서

우리가 중진국 진입이라는

희망과 꿈에 벅차 있었다.

대통령과 국민은 하나가 되어

꿈과 희망을 안고 열심히 일만 하였다.

 

자칭 민주화 투사들은 말하기를,

"70년대에 유신헌법은 유신독재체제"라고

비난하고 있다.이거 또한

거짓된 민중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유신헌법 체제 동의는

전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 하였다.

우리는 유신체제로 인해 더욱더 중화학, 중공업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진국 진입이라는 희망을 낳게 되었다.

우리는 80년대가 가장 호황기 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80년대에 꽃피운 시기는 박 대통령의

유신헌법 개정통과로 인한 경제개발 덕이었다.

 

만일 당시 유신헌법의 개정 통과가 불발로 끝나고,

자칭 민주화 투사란 분들이 집권 하였다면,

우리나라는 끔찍한 상황이

이미 일찌기 발생하였을 것이다.

 

70년대에 대학가는 연일 데모로 얼룩져 있었다.

여기에 선봉에 선 자가 김영삼, 김대중씨였고,

김대중씨가 특히 심했다.

김대중씨는 대학가 강단에 서서

당시 학생들에게 민중선동을

일으키면서 학생운동에 불을 놓았다.

당시 김대중씨의 수제자들이

현재 집권 열우당의 실세들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대학생들에게는 이들 데모만

주동하는 학생들을 너무 싫었다.

학교는 툭하면 휴강 하였다.

당시 모범 대학생들에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대학생들의 말을 빌려보자.

" 저 개XX들, 또 데모질이다"

"저 개XX들중에는 어떤놈들은 김일성 초상화 밑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책을 숨어서 몰래 본다고 하더라"

"저 개XX들 하고는 말도 하지 마라"

 

일반적으로 70년대는 민주화 투사가 독재자와

맞서 싸운 얼룩진 시기라고 교육을 하고있다.

이것은 철처히 오도된 잘못된 교육이다.

자칭 민주화 투사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는

자기들을 미화하기 위한 위장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나는 박 대통령 시절에

어린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내 눈으로 박 대통령을 똑바로 보았었고,

당시 상황을 진실되게 말하는 것뿐이다.

 

박 대통령은 절대로 독재자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우리나라를 부강한 국가로

이끈 훌륭한 대통령이시고,

우리 국민들을 절대로 억압하지 않았다.

단지, 당시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에 몰두하고 있을때,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으면서

민중선동을 일으키며 데모만

주동하였던 작자들만 탄압을 받았었다.

 

특하면 좌익들이 그땐 총칼로 사람들을 막
죽였다고 젊은애들을 속이지만
박정희가 살인마란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 사형언도 받은 숫자는 48명으로
1년에 3명이 체안된다.
전부 극악한 흉악범들 아니면
남한체제 전복을 기도한 역도들이였다

 

 

그렇다면 자칭 민주화 투사인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를 방만하게

운영하면서 IMF 사태를 초래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체제하에서,

IMF 조기졸업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미명하에,

외국자본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기업을 외국에

헐값으로 팔아 버렸다.

작금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IMF 체제하에 무려 170만명의 가장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 몰렸다.

한 가정이 4인임을 감안할 때 무려 700만명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 누가 이들의 아픔을 달래 줄 것인가.

무책임한 돌파리 의사가 주사나 약 처방

과도하게 남발한 것이였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집권하면서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로 얼룩졌었다.

최근에는 국정원의 도청 비리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이들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민주투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부도나게 하였지만,

이 분은 반공이념이 투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안보는 불안하지 않고,

국민들이 그런데로 마음 졸이지 않고 살았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나라가 위기로

치달을 시 금융개혁 입법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야 대권주자를 비롯한

정치권이 개혁시도를 방해 하였다.

결국 우리나라는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당시 정치권은 썪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간첩 한마리도 안 잡고,

더구나 북한이 남한을 향해 뚫어놓은

땅꿀조차도 발견하지 않았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이 안보 불안으로 국민들이

너무나 고통을 겪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혹시 부정에 개입할지도 모르는

친인척을 엄중하게 감시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친형은 가난한 농부로 여생을 보냈고,

친 누님은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또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철저하게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침실 화장실에는

물을 절약하기 위해,

벽돌 한장을 놓고 살았다.

또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때 보니,

20년된 다 떨어진 혁띠와

손목시계를 차고 계셨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전국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가보니,

할머니들이 정화수 물 한그릇을 떠 놓고는

박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당시 전국에 농촌의 할머니들은 다 이랬다.

그래서 당시 일간지 신문에도

이런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씀하셨다.

"민주화는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잘 살게 될때

진정한 민주화가 성숙될 수가 있다"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나라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덕분에

선진국 진입을 꿈꿀수가 있었고,

이로인해 중상류층이 두터운 층을 이루게 되었다.

두터운 중상류층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히 민주화를

이룩할 수가 있게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이어지며서

우리나라는 나라경제가

힘을 잃으면서 중상류층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

중상류층의 몰락은

경제민주화를 몰락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정 민주화에 공헌한 분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란 말이더냐.

 

우리는 최소한 세상을 똑바로 알고 살자.

제발 거짓 선동꾼에  속지 말고 살자.

 

 

-누가 유신을 함부로 말하는가?--

현재 열우당과 그 추종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평가할 때 현재의 가치기준밖에 적용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가히 단세포적인 두뇌를 가진 집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가치관으로 평가하여 나약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현 세대들을 세뇌하려는 모리배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치가들이 '유신'을 악의 대명사처럼 폄하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신헌법'이란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을 총칼로 겁박해서 강제로 통과시킨 대악법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칭 '민주투사'라는 사람들은 '유신독재'란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유해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령, 60-70년대에 버스안에서 어떤 어르신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치자. 그 당시에는 유쾌하진 않았을 지 몰라도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젊은이가 '아저씨, 버스에서 담배피우시면 안됩니다'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용기있는 사람이다. 현재의 잣대로는 아무리 나이드신 어른이라도 버스안에서 담배피운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적 사실은 시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신통치는 독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독재'란 것은 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통치자가 강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좋은 예이다.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국민을 겁박하고, 불리한 지역에서는 투표를 방해하고,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1972년 11월에 실시되었다. 투표인명부에 등재된 투표인수는 15,676,395인 이었고 이중 91.9%에 해당하는 14,410,714인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며, 이중 찬성이 91.5%에 해당하는 13,186.559표로서 유신헌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세상에서 국민의 90%이상의 지지를 받은 정권에 대해 '독재'라고 매도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지 않을까? 집권후, 10년간 자유당 잔재를 청산하고 5000년 유산인 가난을 몰아내준 지도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모두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였더란 말인가?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부의 주도하에 산업전선에서 피땀흘려 일하며 세계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 칭송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 직업도 없이 민주화운동 한답시고 국가에 저항하고 감옥이나 들락거리든 사람들을 국민들은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자칭 '민주투사'란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거꾸로 물어보고 싶다.

물론 국민소득 1만불 시대인 현재의 상황에서는 유신통치와 같은 형태가 허용되기 어려울 것이란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재야운동가들 중에 인정받아야할 분도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을 받을려면 박정희 대통령과 그 당시 산업전선에서 묵묵히 일하셨던 분들을 먼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불행히도, 열우당과 민노당의 자칭 '민주투사'들은, 극소수에 속했던 자신들의 생각은 옳고 대다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틀렸다는 아집과, 피해의식에 따른 보복심리로 과거사 전체를 부정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들인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에겐 박대통령 시절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평가도 금기시 되어 있다.

요컨대, 현재의 잣대로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하려는 외눈박이들은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세월이 갈수록 그 당시에 사셨던 분들이 자꾸 돌아가셔서, 진실을 말해줄 분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점이 심히 유감스럽다. '유신'이란 것이 현재 정권을 잡은 모리배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헌정질서를 유린한 악이 아니라, 그 당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분명한 사실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용기있는 정치인이 한나라당에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90년대말 경제위기 때 재야운동권의 큰 어른이신 백기완 선생의 말씀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래도 박대통령은 나같은 사람은 핍박했어도 나라전체는 잘살게 해줬는데 지금 이놈의 정권은 뭐하는 집단인지 모르겠다.' 불행히도 권력에 눈이 먼 작금의 열우당 시종잡배들에겐 자신들이 가장 존경했던 어른의 말씀조차도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고 있다.

 


[펌] 박정희를 다시 생각하며...

 

저는 젊은 20대의 경제학을 전공한 여성입니다. 
태어날때 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 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말로 한국을 망친 챙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이었으므로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에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 이라는 단기간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활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 진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안병직교수 ‘마르크시스트→뉴라이트’ 사상전환 첫 고백

“집권 운동세력 나라 위기몰아”
이미숙기자 musel@munhwa.com
    “南北현실 외면 ‘통일지상주의’ 어불성설” : 한국좌파 경제학의…
    安교수의 ‘캐치 업 이론’ : 70년대 이후 운동권 사상논쟁의 한축…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5일 “지금 집권 민주화 세력이 한국 사회를 구렁텅이로 이끌려하기 때문에 뉴라이트 운동에 나서게 됐다. 한국이 위기이기 때문에 무리하게라도 얘기를 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사상 전환 과정과 배경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안 교수는 특히 70년대까지 신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따라 한국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측하다가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경제를 살리는 걸 보고 충격을 받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인 안 교수는 “요즘 한자리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와 운동도 같이 하고 내가 기른 사람들”이라며 여권의 핵심인사들을 실명거론하면서 “이들이 노무현 정부를 건달정부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선진화를 위해선 한미공조를 통한 국제협력노선이 최선인데 참여정부는 민족자주쪽으로 경사되고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이들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민족자주를 내세우며 한미동맹을 이완시키는 것은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계산에 말려드는 꼴”이라고 비판한 뒤 통일운동을 펴는 학계의 원로교수들도 실명거론하면서 “북한현실을 외면하고 민족을 사지로 몰고가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안 교수는 학계의 박정희 전대통령 재평가론에 대해선 “과거 그를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봤지만 이젠 한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본다”면서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중진자본주의로 나간다는 캐치 업(catch up)이론에 입각해 보면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론은 탁월하며 박정희식 군부 독재가 아니었다면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인혁당 조작이라고? 그게  조작이다
이영민 / 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대변인
국정원의 과거사 「眞實위원회」는 「진실 왜곡위원회」라야 맞다
2005년 12월 7일 이른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과거 1. 2차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국가기관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함부로 범죄자로 단정해 버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개입한 정황이 명확하다고 발표하였다. 국가기관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함부로 범죄자로 단정해 버린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는 얼마 전에도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하여 코미디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여 전 국민의 비웃음을 산 적이 있다. 그때도 그들은 아무 증거도 없이 박 대통령의 개입설을 일방적으로 발표했었다. 몇 달 간격으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물 쓰듯 하며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 이제 그들의 주장의 허구성을 한 번 파고 들어가 보자.
김형욱은 역대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 국정원장 포함)중 최장기간동안 재임한 기록을 세웠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해임당한 후 미국에서 반 체제활동을 해왔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인 만큼 그의 회고록에는 박 전대통령에 대해서 부정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지만 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조작됐다는 말은 없고 다만 그의 표현대로라면 󰡐심증은 뚜렷하지만 물증은 없었던 까닭󰡑에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7년 동안 가장 다루기 어려웠던 사건이라고 털어 놓고 있다.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의 발표야말로 조작이며 터무니없는 허위임이 분명>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주범인 金培永(김배영)은 체포된 후 일단 무혐의로 풀려난 틈을 타서 또 다른 공범인 미 체포된 禹東邑(우동읍)과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그는 공작금과 난수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북괴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만으로도 인혁당이 북한과 연결된 조직이라는 것은 분명하며 이것이 조작이라는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의 발표야말로 조작이며 터무니없는 허위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검찰은 중앙정보부가 수사한 이 사건에 대하여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혐의를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기소를 거부하는 등 공소를 엄격히 하였다. 당시 이 사건의 기소를 거부하였던 이용훈. 여운상(여운형의 친척) 검사가 물러나는 등 진통을 거듭한 끝에 처음에 구속기소 되었던 26명중 13명은 검찰이 공소취하, 공소장변경등으로 석방되었고 기소되었던 13명 중에서도 副責(부책)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춘우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것 외에 나머지 11명에게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으로써 당시 빠져나갈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최소한의 인원만이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가 이 사건 전체를 조작되었다고 결론내린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조작되었다는 것인가. 당시 도예종은 10년 후 다시 인혁당을 재건하려다가  체포당해 기어이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 이들의 구명운동을 하다가 추방당했던 시노트 신부는 2005년 4월 3일 방영된 MBC TV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자신은 인혁당이 무고하다고 주장한 적은 없으며 다만 형이 너무 무겁다고 말하였을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즉 당시 인혁당 구성원들의 구명운동을 했던 외국인 신부조차도 인혁당의 무죄여부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답을 피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인혁당 사건이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2차 인혁당 사건 당시 함께 체포되었던 이철. 유인태 등 민청학련 구성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고 석방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인혁당은 북괴와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조사결과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의 발표대로 이 두 사건이 모두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굳이 민청학련은 풀어주고 인혁당은 사형을 집행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왜 똑같은 국사범이라면 한 쪽만 봐 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도대체 누구를 조사했고  무엇을 조사했단 말인가?>

「과거사위원회」는 이번 조사가 국정원과 검찰, 국방부 등에 보관된 자료 위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보존 문서 중 핵심 자료는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또 사건 피해자를 제외한 면담 조사자는 불과 30명에 그쳤고 특히 각 사건 수사에 관여했던 당시 대공수사과장 이용택씨를 비롯한 전직 중앙정보부 직원 8명은 모두 「과거사위」의 면담 조사에서 사건 조작이나 고문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렇다면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도대체 누구를 조사했고 무엇을 조사했단 말인가.
또한 지난 12월 7일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도 조사의 객관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이에 대해 「과거사위원회」 측은 󰡒관련자 증언은 착각이나 정치적 입장 변화에 따라 부정확해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과거사위원회」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왜곡되었다는 별도의 증거를 확보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함부로 자신들의 견해를 강요한다면 그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조사대상사건들과 차이점이 무엇인가.  
이번에 「과거사위원회」는 관련자 증언이나 자료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사건이 박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미 「의문사위원회」 등에서 용공 조작이라는 결론이 내려져 재심이 청구된 사건을 조사하면서 여러 시민단체가 주장한 방향으로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정권과 코드가 맞는 결론이 도출되는 상투적인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지난 번 김형욱 실종사건 조사결과 발표를 재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는 그들의 활동이 진실규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며 오로지 특정인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또 다른 특정인이 바라는 바를 대행해주는 정치적 폭력청부업자로 전락하였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체성 허물기, 김대중 제2건국 운동 노무현 과거사진상규명운동으로 절정에>

작년 12월 27일 법원은 74년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 재심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라는 점을 법원은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동안 1. 2차 인혁당 사건 모두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해왔던 좌익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다.
작년 1월28일자 코나스(안보신문)의 김철 기자가 쓴 󰡐국정원 과거사, 객관적 진실규명 기대 어렵다. 진상규명 민간위원 10명 전원 민족해방(NL)계열..편향성 지적󰡑제하의 기사를 보면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민간위원들의 성향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하나같이 좌파를 지향하고 있는 편향적 인물들이며 지금도 국가보안법 철폐, 범민련 한총련 등의 이적단체 합법화 추진, 송두율 무죄처리등 소위 민족공조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들이 과연 진실을 규명하고 있는지,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에서 시작, 제2 건국→태극기 부정까지>

이것이야 말로 과거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서부터 출발한 대한민국 정체성 허물기 작업이 김대중 정권의 제2건국운동(여기서부터 태극기, 애국가 부정운동이 출발하였다)을 거쳐 현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으로 절정에 올랐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추진을 거쳐 다음 단계인 군축, 평화협상을 마무리하면 저들이 바라는 적화통일의 완결로 되는 것이다.
물론 인혁당이 반국가단체라 하더라도 조직의 특성상 거기에 가담한 일부는 모르고 가입했을 가능성이 있고 수사 도중에 억울한 혐의가 추가된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이 사건 전체가 정권의 조작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국가전복 행위를 뒤덮으려는 역사왜곡이고 또 다른 범죄행위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필자가 한 가지 더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김만복 국정원 기조실장의 이력에 대해서이다. 김만복 기조실장은 과거 부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다가 60년대 말 당시 중앙정보부가 시국사건담당부서인 제6국을 창설할 때 창설요원으로 특채된 인물이다. 바로 이번에 문제가 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직접 조사한 장본인인 것이다.

<과거사진실 왜곡위원회로 명칭 바꾸던지 그만 해체하던지 용단을 내리기 바란다>

그는 김대중 정부 말기 국정원에서 해임되었다가 세종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는데 당시 세종연구소에 있던 이종석씨가 NSC 사무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정보담당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대학동문인 김승규 국정원장이 취임하게 되자 기조실장으로 임명되어 도청사건과 과거사 진실위 활동을  총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자기가 과거에 직접 조사한 사건을 180도로 뒤집어서 발표하는데 참여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이 조사한 사건을 자기 손으로 직접 뒤집는 사람은 없다. 이는 도의적으로도 있을 수 없고 이런 해바라기성 인물이 발표한 결과가 과연 믿을 만 하다고 볼 수 있을까.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는 이제 국정원 과거사진실왜곡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던지 아까운 국가재정을 낭비하지 말고 그만 해체하던지 용단을 내리기 바란다.                  

 

[포커스] 진실위의 역겨운 "인혁당 발표"를 보고..
- 박정희 정권의 조작보다 더 기만적인 노무현 정권의 조작..
(시대유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1,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발표에 의하면 1차 인혁당사건은 강령과 규약이 일부 논의됐어도 채택된 적이 없고,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반국가단체로 볼 수 없다고 주장을 했다.. 2차 인혁당(민청학련)사건 역시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반유신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며 그들의 목적이 사회주의건설이 아닌 민주투쟁이라고 주장을 했다..

즉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세력을 박정희 정권이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세력으로 왜곡하여 탄압을 했다는 것이 이번 발표의 요지다.. 그리고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인권유린이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들의 사형을 지시했다는 내용을 증거 없이 상황논리에 따른 추론으로 확정 지어 발표를 했다.. 나는 이 발표를 보고 웃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기 때문이고, 너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처리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의 무리수나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 역시 유감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실위의 발표는 나를 웃겼다.. 왜냐면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을 처리한 것 보다도 더 큰 왜곡과 뻔뻔한 기만이 그들의 발표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철면피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든다..

먼저 인혁당 사건이 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혁당이란 인민혁명당의 약자다.. 한일협정반대데모와 유신헌법 철회 데모가 가열되었던 1974년 계엄령을 선포 하에서 발생된 두 차례의 용공 사건을 인혁당 사건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1차 사건의 경우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했던 서울대의 “불꽃회”와 고려대의 “구국투쟁위원회” 등을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공산혁명세력으로 적발한 사건이다..

2차 인혁당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불리 우는데, 유신독재반대투쟁을 주도했던 배후세력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북과 내통하는 공산혁명세력으로 적발 된 사건이다.. 진실위의 발표는 이들이 공산혁명을 추구하는 용공세력이라는 박 정권 시절의 판결이 조작된 것이며, 북한의 방송을 몇 번 청취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공산혁명세력은 아니고 단지 한일협정과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주세력이라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진실위의 판단은 좌파들이 그토록 수구언론으로 매도하는 신동아나 월간중앙에 80년대 게재되었던 수준의 내용일 뿐이다.. 사실 인혁당 사건은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또한 인혁당 사건에 대한 그간의 담론의 조작의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본질과는 다소 괴리가 있었다.. 신동아나 월간중앙의 기사 역시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접근한 기사에 불과할 뿐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인혁당 사태에 대해 가장 깊은 수준의 연구를 했던 것이 80년대 NL(주사파)과 PD(맑스파)로 나누어지는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그들은 당시 남한사회의 좌파세력의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을 한다.. 60년대 이전 북한의 노동당을 전위정당으로 규정하는 “민주 기지론”에 의거 활동하던 남한의 좌익들은, 60년 이후의 상황변화에 따라 남한 내의 독자적인 지하당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민주기지노선 하에서 지역혁명론”을 제기했다..

즉 “남한 인민들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형명적 당을 독자적으로 꾸려야 하며, 이 당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혁당 사건이나 통혁당 사건 같은 박정희 시절의 공안사건을 남한 내에 전위조직을 건설하는 혁명과업의 과정으로 판단을 한다..

또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부산의 암장(마그마)그룹은 1954년 고교학습서클로 태동하였지만, 4.19 당시 또 다른 인혁당 사건의 연루자들인 도예종, 서도원 등을 만나 전위그룹을 형성하며 맑스레닌선집, 스탈린선집, 도이치이데올로기, 반듀링론, 공산당사 등 각종의 이론서와 월북작가, 역사학자들의 책을 섭렵하며 공산혁명운동을 수행하였다. 그 중에는 인혁당을 80년대 학생운동 양대세력 중 맑스파인 PD세력의 원조로, 통혁당은 NL세력의 원조로 보는 자들까지도 있었다..

또한 좌파 역사학자들은 인민혁명당이라는 이름이 베트남의 인민혁명당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들이 이러한 이름을 정한 이유는 베트남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북베트남의 노동당을 형제당으로 생각했던 남베트남 공산세력과 같이, 북한 노동당을 형제당으로 생각하는 남한 노동당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까지 주장을 한다.. 좌파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자료는 다 인용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즉, 인혁당 사건이 당시 남한 내의 공산혁명세력이 북한 노동당과 형제의 관계를 유지하며 남한 내의 공산혁명을 주도했던 전위 조직임은 좌파 역사학자들이 커밍아웃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진실위는 뻔뻔하기 그지 없게 이들을 공산혁명세력이 아닌 민주세력으로 둔갑을 시키며 대국민 기만을 하고 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들을 복권 시키고 국가에서 보상금도 주며, 민주투사로 둔갑을 시킬 모양이다..

나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처리가 절차나 과정상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며 유감으로 생각을 한다.. 형량도 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공산주의자들이 민주투사로 둔갑을 한다는 것은 또 한번의 기만이며 조작이고 대국민 사기극이 아니겠는가? 물론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솔직히 까 놓고 이야기를 해 보자..

쉬쉬하지만 우리사회에 모두 다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지금 현정권의 주축이 된 80년대 학생운동권 세력들의 정체가 뭐냐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민주투사를 참칭하고 있지만, 그들이 주체사상이나 맑시즘을 추종하며 남한 내의 공산혁명을 꿈꾸던 자들이 아닌가? 부디 아니라고 하지 말기 바란다.. 나 역시 그 조직의 한 부분에 속해 있었고 경험한 사실이니 말이다.. 위에 인용한 자료도 원한다면 출처를 다 알려줄 수 있다..

그런 자들이 정권을 잡고 스스로 민주투사를 참칭하고 있으니,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공산혁명분자들 역시 민주투사로 둔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신들이 구린 것이 있으면 차라리 하지를 말던지, 도대체 이 기만적이고 비열한 정권을 어찌 평가해야 할까! 예측은 했지만, 너무도 뻔뻔한 그들의 기만에 치가 떨릴 정도다.. 부디 해도 해도 정도 껏 하기를 바란다..

 시대유감

 

 

"특정 단체와 운동권 출신 인사로 편중된 그들만의 역사편집"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는 14일 정부의 과거사정리와 관련 “과거사 기구 인적 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바른사회는 이날 논평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과거사 기구에 채용된 직원이나 조사관들 중 특정 단체나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고, 특정 사건과 연관된 이해관계자까지 다수 섞여 있어 균형 잡힌 과거사 진상 규명 활동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바른사회는 진실화해위에서 공개한 인적사항에 대해 “채용 직원 15명과 조사관 45명 중 김동춘 상임위원 소관의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소속 조사관 19명 중 4명이 김 위원이 임명 전 사무처장과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출신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공개 채용된 19명의 조사관 중 무려 4명씩이나 특정 단체 출신이라는 것은 해당위원회의 장과 연관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낙하산 내지 코드인사라는 의심이 들게 한다”면서 “인권침해규명위원회 조사관 17명 중 3명은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출신”이라고 밝혔다.

바른사회는 또 “반민규명위의 인적 구성에서도 별정 4급 4명 중 1명, 별정 5급 7명 중 1명, 별정 6급 10명 중 1명, 조사관 20명 중 2명은 자의적으로 해석한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해 물의를 빚었던 민족문제연구소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과거사모니터단장인 박효종 교수는 “과거사 기구의 인적 구성에 대해 검토하면서 과거사 규명 활동을 통해 역사 속에 묻혀 졌던 진실이 밝혀지고, 그로 인해 과거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 명예 회복을 하게 된 긍정적 측면이 과거사 기구의 인적 구성의 편향과 이해 관계자의 개입으로 퇴색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과거사모니터단은 지난 3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진실화해위와 반민규명위에 현재 활동 중인 직원과 조사관의 채용 전 경력 사항에 대해 정보 공개를 청구하여 반민규명위 소속 인원 79명과 진실화해위 소속 인원 60명에 대한 자료를 제공받아 조사했다.

2006/06/15

 

 

 

제목 : 백기완 충격발언
재야의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께서 드디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그래도 백기완 같은 사람들 3만명을 못살게 했지만
수많은 국민들은 배불리 먹고살게 해주었지만
어설푼 민주화를 한다는 두김씨와 노무현 추종세력들은
대부분의 국민들을 거지 일보직전으로 만드러 놓았다고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펌글]
제목 : 백기완선생의 박정희대통령 평가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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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당시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빨리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라고
기네스북에 오른나라,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때 가장 반대한 분들을 아시는지요?

당시 그 누구든지 대통령이었다면 그 정도 경제 발전은
이루었다고 하신 분들을 아시는지요? 이야기하기는 쉽습니다.

몇 년 전에 세종문화회관 뒤에 백범연구소로 백기완 선생을 찾아가서 소주 한 잔하며 귀국인사를 드린 적이 있는데(이분은 소주병 들고 찾아가면 참 좋아하십니다) 백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박정희는 나같은 인간 3만명 정도 못 살게하고
일반 국민은 그래도 등 따시고 배 부르게는 했는데
지금 양김 대통령은 국민을 거지로 만들었다고 하며 어찌된 나라가
전두환부터는 대통령되면 지뱃속차리기만 하고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국가의 비젼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더군요.

지난 후에 과거를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모르면 더더욱 비판이 쉬울지 모릅니다.

분명 과거에 잘못한 것과 잘된 부분은 구분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계승 발전 할 것은 계승해야 하는데 과거는 다 잘못됐다 하며 단절하고 잘못된 것은 모두 과거의 유물로 돌리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요?

박통 18년하고 양김 10년입니다. 거기에 전, 노 합하면
거의 같은 기간이 지난 지금도 잘못된 것을 모두 박정희 유물로 돌리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독재자의 딸하며 과거와 계속 연관 지으며 그 연속석상에서 생각할려고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요?

모로 젊은이는 미래를 생각해야지 모두를 과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국가장래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겁니다


(덧글 1)
"...백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박정희는 나같은인간 3만명정도 못살게하고
일반국민은 그래도 등따시고 배부르게는했는데 지금 양김대통령은 국민을
거지로 만들었다고 하며 어찌된나라가 전두환부터는 대통령되면 지뱃속
차리기만 하고 국민 은 안중에도 없고 국가의 비젼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더군요..."

아래 글중에서 백기완선생님의 말씀을 적은
부분을 옮겨 보았습니다. 이것을 읽자마자
"아, 역시 백기완선생님이시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신세대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제가 대학다닐때 대학생들간에 백기완선생의 인기는 대단했었지요.
백발에 도포자락 휘날리는 모습도 멋있었고,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사람들을 휘어잡은 그 무엇인가가 있었고요.

서구 선진국들의 근대부터의 발전과정을 보면,
근대화가 되는 동시에 민주화가 이루어 진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방후 이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얻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요.

먹고 살만하지만 독재에 신음하는 나라,
깡통차는 주제에 자유만 많은 나라,
이 두가지 모두 우리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었을겁니다.

둘중 어느 하나도 놓칠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한사람은
조국근대화를 또 한사람은 민주화를 위해서
평생을 바친것이랄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구요.

백기완 선생도 박정희 무지 싫어 하실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실수 있는 이유는 "자유"라는 본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계시기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새가 한쪽의 날개만으로 날수 없듯이, 자유나 민주라는 것도
나라가 잘살지 못하면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덧글 2)
상어지느러미와 닭대가리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지난 80년대초, 무슨 일로 쫓겨다닐 적이다.
계훈제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누가 만나자고 하니 어서 신라여관(호텔) 찻집으로 오라고.
놀랄 일이다.

우리 둘은 노상 만났어도 그 같이 비싼 집에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하지만 나는 이내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를 쫓느라면 노상 뒷골목이나 뒤지는 기관원들의 어림을 비껴가자는 계선생의 타고난 전략일거라고 생각되었던것이다.

그래서 떡하니 빌린거(택시)를 하나 잡아타고 갔는데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찻집 사람이 와서 무슨 차를 들겠느냔다.
아무거나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자 계선생은 도통 차를 안 마시는데도 커피를 두 잔이나 가져와 내가 다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빈 속이 쓰린데도 말이다.그런데도 오겠다던 사람은 아니와 이상하게 여겨 자리를 옮기느라 찻값을 서둘러 치르려던 계선생과
그 찻집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었다.

"찻값이 왜 이리 바싸? 그까짓 볶은 콩을 우려낸 물값이
국수 네그릇 값보다 많으니 이거 잘못 계산한 거 아니냐"고
따지자 그 찻집 사람이 받아친다.

"여기는 그런데라고." "뭐야, 여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데가 아니고 돈을 물타먹는 도둑놈들만 사는 데란 말 아니냐.
못된 것들 민주화란 딴게 아니구먼.

군사독재와 함께 썩어문드러진 것들도 모두 청산하는 것이지….
"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날씨도 으실으실해 얼핏
계선생의 팔짱을 끼고 간다는 곳이 시장 뒷골목 더듬한 찜닭집.

거기서 닭 한마리가 아니라 반마리, 국수 두그릇이 아니라 한그릇,
쐬주 한병이 아니라 대포 한잔, 이렇게 시켰는데 워낙 찜닭을 좋아하시는 터라 나는 손도 안댔는데도 어느새 뼈만 남기시기로

나는 아주머니를 불러 닭대가리가 있으면 한사발 달라고 했을 때다.
계선생이 슬며시 일어나시며 곧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아마도 계선생이 잘못 지레잡은 것이었다. 그 집에선 닭대가리는 거저다.

그런데 입때껏 먹은 값은 되겠는데 닭대가리를 또 시켰으니
돈을 구하러 가신 모양이었다.
그러니 내 엉덩이가 오죽 바늘 방석이랴.대포를 깡으로 두잔이나 마셨는데도 도통 오시질 않으니 어쩔건가.

그 게딱지 같은 집에 손님은 밀리고 밤은 깊어가고 슬며시 일어나자니 돈은 없고 에라 모르겠다 석잔째 마실적이다."실례합니다.
백선생이지요. 잠깐 가셔야겠는데요."라며
철컥 고랑을 채워 끌려나올 때
계선생이 골목으로 접어들다가 이를 보고 멈칫 몸을 사리신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계선생! 하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얼핏 목젖을 적시며 혼자 웅얼댔다.

"고얀 넝감,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오죽 좋아" 그러는데, 닭집 아주머니가 내 등에다 칼을 꽂는다. "아, 닭대가리를 공으로 먹었으면 찜닭값은 내야지, 그냥 가니까 밤나닥 잡혀다니지 엠병할…."

그 뒤 나는 잡혀갔다가 나왔지만 그집이 없어져 외상값은 못 갚고 계선생과 함께 한숨 짓던 생각이 난다."엠병할 자식들, 찻값만 그렇게 비싸지 않았어도 닭값을 잘라먹진 않았을 터인데 말이야. 잡혀가지도 않았고."

계선생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그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계선생이 눈시울을 글썽인다. "이번에 일어나면 말이야, 거 뜨끈한 찜닭 한 놈 먹자우. 닭대가리도 좀 먹구. 그건 공짜라면서?" 나는 딴 것은 몰라도 이 다짐만큼은

꼭 지키려고 했었는데 또다시 꽝! 그리고 세월은 흘러 20여년, 21년을 일한 일터에서 한달에 받는 돈이 세금, 손배가압류, 집세, 이자따위를 빼면 오매 12만 9천원, 그걸 갖고 어떻게 사느냐고 울부짖다 몸에 불을 지른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뜻을 살리자는 모임엘 갔다오는 길이었다.신문을 보니 바로 그 신라여관과 권노갑씨 이야기가 나와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원 저런저런 하는 소리와 함께 멍하니 입을 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권씨도 그 비싼 찻집에서 찻값 때문에 비참한 꼴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김대중 정권의 햇빛정책에 따라 북쪽과 거래를 트는데 도와주겠다며 현대재벌로부터 자그마치 200억원을 받고 이어서

3천만불을 받었는데 그 현장검증을 한다는 기사다. 얼짬(순간) 나는 혼자서 웅얼댔다. "그놈이 그놈이구먼. 정치권력만 쥐었다고 하면 수천억씩 해처먹고 야당이라는 것은 한 재벌한테만 100억을 받아처먹고 더구나 노무현씨는

대통령이 된지 오매 몇 개월밖에 안됐는데도 비서라는 것들이 줄줄이 해처먹다 들통나고 그놈이 그놈, 이게 썅(도대체) 사람의 세상인가"하고 주절댔지 결코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또 한귀퉁이 기사를 보고서는 늙은 주먹일망정
내 손의 식은땀마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

으드득.그것은 딴게 아니었다. 권씨가 바로 그 비싼집에서
상어지느러미를 곁들인 한끼 밥값이 30만원씩이나 하는 것을 일주일에 서너차례씩 와서 먹었다는 그집 일꾼의 증언 기사였다.

점심 한끼 값이 30만원? 그것은 얼마만한 돈일까.
찜닭 반마리 값의 예순배다. 그것을 네댓사람이 함께 술까지 곁들여 먹은 밥값은 약 140만원. 찜닭 반마리의 240배.
그것을 처먹으면서 뇌까린 민주화요,
통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도제 내 힘으로는 어림을 할 수가 없는지 두 다리가 휘청거려져
늦은 가을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저 힘없는 발을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 내가 잘못 살아왔다.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이제부터 나의 명제, 참 민주화다,
통일이다 하는 것들은 첫판부터 다시 차름(시작)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남은 목숨을 몽창 걸고."
그런 푸념을 하면서 20여년전 계선생과 같이 갔던 닭대가리집
언저리를 두리번 두리번 했지만 아무도 없구나.

모두들 어딜 갔단 말인가. 차가운 가을비는 전과 똑같은데 아..
모두들 어딜 갔단 말인가….

햄버거 간판을 흔드는 가을 바람보다 더 세차게 늙은 주먹이 울었다.

2003.11.  

 

 

박정희의 파병, 때리려면 제대로 때려라 | 민주시민교실

 

베트남파병과 조국근대화

 

연합뉴스가 박정희 때리기에 앞장섰다. 2005.8.27자 신문들에, 전날 공개된 외교문서를 무식하게 해석해여 기사를 내보냈고, 동아, 조선 등 우익 일간지들도 연합뉴스를 그대로 베껴 박정희와 파월용사들을 폄하했다. 이 중에 이런 비난이 들어 있다.  

“주월 미군의 1인당 비용은 1만3천달러, 파월한국군은 5천달러, 필리핀 비전투원은 7천달러. 필리핀에 비해 몸값을 터무니없이 싸게 팔았다”  

“미군의 1인당 비용이 13,000달러인데 반해, 한국군이 왜 5천 달러에 불과하냐?”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는 신문은 없다. 모두가 “필리핀 군인도 7천 달러였는데 어째서 한국군인이 5천 달러였느냐?”라고 비난한다.  

이 비난에는 한국군 1인당 비용이 미국인보다는 싸야한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왜 우리보다 못사는 필리핀보다 더 못 받았느냐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군 비용이 한국군 비용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미국이 우리보다경제적 선진국이라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임금과 한국의 임금은 분명 다르다. 지금도 한국인 1명을 살 돈으로 중국인 10명을 산다. 중국인 한 사람을 고용하면서 한국인에 주는 봉급을 똑같이 주어야 한다면 왜 한국기업들이 중국으로 싼 임금을 찾아 나가는가? 똑같은 이유로 군인도 국적에 따라 몸값이 다르다.

필리핀! 지금 현재, 필리핀의 1인당 GNP는 1,000달러, 태국은 2,000 달러, 한국은 1만 달러 수준이다. 한국이 10배 더 잘산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달랐다. 남한의 GNP 79달러, 북한 117 달러, 태국과 필리핀이 각 300달러 수준이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필리핀과 태국은 새까맣게 올려다 보이는 선진국이었다. 이런 통계를 감안한다면 그 누구도 당시 한국군인의 몸값이 너무 가벼웠다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와 월남참전 비하하는 좌익들


한겨레21에 실린 한홍구(성공회대) 교수의 글이다. "동일계급을 비교할 때, 필리핀군이나 태국군의 30-40%에 불과한 싼값에 우리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보냈을까?", "대일 청구권 문제는 무상 2억 달러, 유상 3억 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다. 당연히 일본으로부터 배상 받아야 할 금액을 받아내지 못하고, 그걸 보충하려고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보낸 박정희가 유능한 대통령일 수 있을까?",

한 교수는 2000. 5. 6일 심야토론에서 용병론의 근거를 값싼 피 값이라고 했다. "한국 소장 354불, 필리핀 소대장 442불, 태국 소대장 389불"을 내걸며 값싼 용병이라 주장한다. 소위 수당을 보자. 한국군 소위 151.55 달러, 월남군 103.35, 미군 435.85, 필리핀군 441.92, 태국군 389.33 달러였다.


여기에서 한홍구 교수는 눈에 보이는 비교표만 본 것이다. 이런 비교는 누구라도 한다. 필리핀과 태국은 한국군이 누렸던 특수를 누리지 못했다. 파월 기간중 한국군 병사가 고국에 송금한 수당은 1억7,83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한국군과 직접 연관되어진 "월남으로부터의 송금액"만 해도 8억5,760만 달러다. 수당은 전체 송금액의 불과 20%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각국 장교들과 비교해보자. 한국군 소위가 직접 받는 수당은 불과 151.55 달러지만 소위 한 사람이 정부에 벌어준 돈은 757.75 달러였던 것이다. 이는 가장 많이 돈을 받는다는 필리핀 장교 수당의 1.7배나 된다. 여기에 무역, 외자 유치 등의 효과를 합하면 1인당 17,000달러가 된다. 이는 필리핀 소위 수당의 40배나 된다.

여기에 파월 효과가 빚어낸 외국인 투자, 수출효과, 해외진출 효과, 이민효과, 경제 및 군사원조, 한국군 현대화, 방위산업, 대미수출, 중동특수, 한강기적이 일궈낸 가치 등을 종합해보자. 태국과 필리핀에게 이런 특혜가 주어졌던가? 숫자를 놓고 단순 비교를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한다. 한국현대사를 쓰고 있는 교수의 분석력과 시각이 이러하면 한국현대사에 문제가 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에 파병을 한 것에 대해  감정적인 비난을 한다. 그러나 월남 파병이 없었으면, 당시에 안보도 없었고, 월남에 진출한 미국기업들을 통해 산업 역군을 훈련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며, 그들을 중동으로 내보내 중동특수를 일구어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월남 파병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야당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파병 결심을 놓고 젊은 피를 팔아먹는 흡혈귀라는 식으로 악담을 하였고, 파월 용사들이 벌오온 달러로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를 가리켜 농경지를 말아먹은 반국가적 도로라며 지독한 욕들을 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가 없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생각할수가 있는가?

그당시 미국이 파월의 댓가로 지원한 돈 때문이 아니다.
베트남 그곳에서 우리 공병대와 건설인원들은 교각을 놓고 길을 뚫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때문에 건축실력을 세계에 인정받아 서남아시아에서 운하건설등 여러가지 공사권을 따내게 된다
.

월남파병을 계기로 사회 각 분야의 해외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됐다. 수출을 국가의 주력으로 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이는 매우 결정적이고 긍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덧붙여 국내 좌익세력들이 주장하는 파병수당을 박정희정권이 착복해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악선전이 있는 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베트남 참전은 조국근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에게는 파월 한국군의 성과에 대한 결산서가 제공된 적이 없다. 이는 국가발전의 최고 수훈자들인 파월 장병들의 노고를 묻어버리는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빈틈을 파고들어 파월 한국군을 학살집단이요 용병으로 매도하는 집단이 있다. 33세의 여성 특파원 구수정씨를 중심으로 모인 희한한 집단이다. 그녀는 국내에서 국가 소용사태에 관련돼 처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21, 동국대 강정구 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등이 구수정 여인을 추종하면서 베트남 양민 학살론을 창조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을 격하시키고, 32만 파월 장병 및 500만 파월 가족의 명예는 물론 한국군 전체의 위상과 명예를 격하시키는 음모다.

1999년 9월2일자 한겨레21 273호가 주월 한국군을 20세기의 광기와 야만 그리고 용병으로 정의했다.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세력과 반역세력간의 대결로 정의했고, 미군, 한국군, 월남군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한 호주군, 뉴질랜드군, 대만군, 필리핀군, 태국군, 영국군을 반역군으로 정의했다. 정확히 공산주의 로선이다.

구수정이라는 여성 통신원이 이끄는 폭로 기사는 1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 . 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

한홍구 교수의 글에 나타난 대일 청구권 배상액도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인데도 불구하고 한홍구 교수는 "대일 청구권 문제는 무상 2억 달러, 유상 3억 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사실과 다르지 않은가?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해야


당시 한국군의 실정을 보자. 한국군 유지비의 70%가 군원으로 충당 됐다. 군간부들은 한편으로는 박봉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루한 군사문화에 숨 막혀 했다. 소위의 국내 봉급은 겨우 5,350월, 소득세 등을 제하고 나면 실수령액이 4,596원이었다. 환율은 1달러 당 255원이었다. 불과 18불이었다.

고급장교들은 시각이 좁아 공연히 부하 간부들을 괴롭혔고, 비전 없는 군 생활에 하급장교들의 불만은 포화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장교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회가 생겼다. 파병해서 죽고 사는 건 그 다음의 문제였다.

우선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전투경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남부다 뒤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비겁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당시 소위가 받았던 전투수당은 120달러, 그래도 국내봉급까지 합치면 월수입은 7.6배로 향상됐다.

파월 장병들의 사회적 인기는 대단했다. 이광재 아나운서는 "국가의 명예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저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들의 모습을 보라"며 북받치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고, 연예인, 주부, 여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행진하는 파월 장병들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종로통의 거리와 빌딩 속 창가에는 환송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에는 파월장병이 최고의 인기였다. 전국에서 위문품이 쇄도하고, 쏟아지는 위문편지, 펜팔이 장병들을 신나게 했다. 대한 뉴스의 앞머리는 거의가 다 파월 장병의 업적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감격은 파월 장병의 가슴에 가장 아름답고 신났던 추억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파월로 인한 가시적인 성과는 엄청나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군의 현대적 사고방식과 행정현대화였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훈련하고, 국제 매너에 익숙해지게 됨으로써 군사문화가 획기적으로 발전됐다. 이는 해외 유학보다 더 큰 기회였다.

한국군은 실전경험 특히 북한의 최고 위협이 되고 있는 비정규전 능력을 쌓게 되었고, 초 현대무기에 대한 개념을 터득했으며, 연합작전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오랜 동안 외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피압박민족에 배어있던 무기력함과 자조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한국이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월남에서 42개월간 근무했다. 필자의 인생에 있어 가장 황금기요, 가장 값진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은 바로 월남이다.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이야기 거리가 많은 곳이 바로 월남이다. 파월 기회는 필자를 군인으로서 성장시켰고,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잡게 했고, 지휘와 경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수를 터득시켜 주었다.

필자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게 아니다. 육군3사관학교부설 충성대 연구소는 1999년에 1,000명의 일반 국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69.1%가 파병된 한국군을 좋게 평가했고, 좋지 않다고 평가한 사람은 불과 6.8%로 나타났다.

파병이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85.8%가 기여했다고 대답했고, 불과 4.8%만이 저해됐다고 답했다. 88.1%가 경제성장의 계기가 됐다고 답했고, 2.4%만이 악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도 연령에 따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60대 이상에서는 89.0%가, 40-50대에서는 94.6%가, 20-30대에서는 60.7%가,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

위 연구소가 265명의 참전 용사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다시 참전하라면 하겠느냐는 질문에 장교의 81.2%, 하사관의 83.3%, 병사의 59,7%가 재 참전 의사를 밝혔다. 파월 장병의 모습이 훌륭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69.1%, 파병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76.4%였다.

월남전을 계기로 한.미 안보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했다. 1961-65년, 5년간의 군사원조 총액은 8억1,500만 달러였다. 하지만 1968-72, 5년간에는 22억8,700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신예구축함 2대, M-16소총 국산화 지원, 유도무기 지원, 각종 방위산업 기술 이전, 파월 군 전체의 신무기 무장, 3개 향토사단의 정규 사단화, 17개 육군사단 및 1개 해병사단의 장비 현대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신무기 및 방위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었다.

1964년까지도 구호물자를 배급받던 신세에서 불과 4-5년만에 우리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게 됐고, 웅크리던 자세를 탈피해 해외진출에도 문제없다는 자신감을 얻게 했으며, 불과 8년만에 우리의 돈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군 장비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그 외에도 외교 역량의 증대 및 한미 안보 관계의 강화는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엄청난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막연히 돕겠다던 느슨한 협력관계가 "인계철선"과 "핵우산"이라는 구체적인 협력관계로 전환됐다.

아마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기회가 못 마땅하여 주월한국군을 격하시키려 할 것이다.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세력과 반역세력간의 대결로 정의하고, 미군과 한국군 등을 반역군으로 정의한 친북 세력은 아마도 김일성에게 민족해방의 기회를 허락해주지 않은 한.미안보협력강화 등을 비롯한 박정희의 업적을 못 마땅해 할지도 모른다.


                                         월남 참전이 이룩한 경제성장 효과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973년도에는 10억2,120 달러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얻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6.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1997년에는 남한이 12.8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남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9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졌다.



     2005.8.28


 
 

출처 : haha
글쓴이 : haha 원글보기
메모 : 너무 길어 아직 다 읽지 못 했고, 간간이 동조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내 생각과 일치한다.